태상준 기자의 CINEMASCOPE - '건축학개론'
[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그런 기억들이 있다. 어느 깊은 곳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 '번쩍' 하며 눈앞에 맞닥뜨리는 그런 기억들 말이다. 누구에게나 사진 한 장 혹은 노래 한 소절 때문에 문득 시절을 거슬러 자동으로 떠오르는 그런 기억 하나쯤은 있다.
'건축학개론'(감독 이용주, 22일 개봉)은 오래 전 기억으로 연결된 두 남녀의 동상동몽(同床同夢) 이야기다. 건축가 승민(엄태웅ㆍ이제훈 분) 앞에 그의 첫사랑 서연(한가인ㆍ배수지 분)이 불쑥 나타난다. 15년만이다. 당황스러운 승민에게 서연은 제주도에 그를 위한 집의 설계를 부탁하고, 승민은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작품으로 서연의 집을 짓기 시작한다. 함께 집을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둘은 기억의 파편을 맞춘다.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교 1학년 시절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나 겪은 첫사랑의 기억이 승민과 서연의 머리 속을 맴돈다.
'첫사랑' 이라는 감성적인 소재를 '건축'에 접목시켜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축학개론'은 지난 2009년 저 예산 호러 '불신지옥'으로 장편 데뷔한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건축사무소에서도 일한 적 있는 감독의 전사(前史)는 고스란히 영화 속에 스며들었다. 이젠 서로 대학 동창일뿐인 둘의 현재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이내 만남의 시작과 감정의 진전을 경험한 후 사소한 오해로 헤어지는 둘의 과거로 넘어간다. 영화 속 과거가 현재와 연결고리가 없는 '과거완료'형이 아닌, 여전히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재완료형' 과거라는 점이 중요하다. 과거 "어쩌면 사랑할 수 있을까?"로 아팠던 승민과 서연은 '어쩌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의 물음에 또 다시 아파한다.
집과 사랑을 연결한 이용주 감독의 선택은 근사하다. 1980~90년대를 재연하는데 그쳤던 과거 복고 영화들과는 달리 '건축학개론'은 과거와 현재의 단단한 이음새를 통해 관객들의 감성과 이성을 고루 건드린다. 1994년 발표된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을 비롯해 호출기와 휴대용 CD플레이어, 강북의 한옥집과 재래시장 등 추억을 자극하는 매개체들은 영화 적재적소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등 네 주연 배우의 앙상블은 '반짝반짝' 빛난다. 슬쩍 '닭살'이 절로 돋는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적인 장면들이 튀어나오지만 괜찮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바보 같고 터무니없었던 일련의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은 오랫동안 놓고 있던 첫사랑의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 내게 한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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