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시청하다다 보면 위로해주고 싶은 인물이 생기더군요. 헤어 나오기 어려운 모진 역경 때문이 아니라 애당초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으로 정해진 채 출발하는, 희망이 없는 캐릭터이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면 평생을 초지일관 연우(한가인)만 바라보다 죽지 싶은 MBC <해를 품은 달>의 양명(정일우)이 이에 해당하죠. 그러나 정의로운 그는 시시때때로 닥치는 온갖 유혹들에도 불구하고 혈육이자 주상인 훤(김수현)에 대한 의리와 충성만큼은 우직하니 지켜내고 있죠. 그래서 초절정 매력남의 사랑을 감히 방해하는 입장임에도 미움을 사기는커녕 오히려 사랑을 받는 걸 거예요. 반면 짝사랑만으로도 억울할 판에 악역이기까지 해서 더 안타까운 경우가 있으니 바로 중전 보경(김민서)이 같은 인물이에요. 어릴 적부터 애가 좀 밉상이었나요. 하지만 야심에 불타는 아버지(김응수)의 희생양이라는 정황이 인정 돼 어느새 동정 어린 시선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MBC <신들의 만찬>의 하인주(서현진) 씨는 어느 누구보다 가혹한 운명의 캐릭터이지 싶어요. 사랑에도 일에도 실패하도록 정해져 있는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시청자의 동정조차 얻기 어려운 악역이니까요.
악역이 지고 갈 운명은 무겁기만 합니다
악역이 가는 길은 끝이 없는 가시밭입니다. 어떻게든 주인공을 이겨보겠다고 아등바등 애를 써보지만 과욕이 화를 부르고 결국엔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져 몰락하고 말아요.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원하는 걸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점이 아닐까요? 인주 씨가 고준영(성유리)이 흘린 목걸이를 손에 쥔 채 “내꺼야, 절대 안 뺏겨”라고 다짐했지만 어쩌죠? 아리랑의 차기 명장 자리가 이미 물 건너 간 건 물론 벌써 오래전부터 남자 친구인 최재하(주상욱)의 마음은 준영을 향하고 있는 걸요. 또 인정받고자, 사랑 받고자 일평생 노력해온 부모님은 어쩌고요. 어릴 시절 어머니에게 혼나고 놀이터에서 혼자 있을 때 “인주야, 인주야”하고 부르며 찾아다니는 소리가 어찌나 따뜻하게 들리던지 한참을 더 숨어 있었다는 인주 씨가 아닙니까.
연우 씨, 내 것이 아닌 이름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세요
그러나 인주 씨는 잊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일탈을 위해 들렀던 클럽에서 김도윤(이상우)에게 도움을 받던 날 똑똑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잖아요. “내 이름은 송연우, 꼭 기억해. 대한민국 서울에 송연우라는 스물일곱 살짜리 여자애가 살고 있다. 송연우, 송연우.......” 스무 해가 넘도록 하인주로 불리어 온 인주 씨가 송연우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인주 씨, 남의 삶을 자신의 삶인 양 살아온 인주 씨는 도대체 언제 자신의 이름을 되찾게 되는 걸까요? 노력 없이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듯 살아왔다면 또 모르지만 누구보다 실력을 갈고 닦아온 인주 씨라서 더 안쓰럽습니다. 얼마 전에도 준영이가 청국장으로 재탄생시킨 신개념 요리가 외국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자 이내 착잡한 표정을 지었죠. 이제 얼마나 많이, 자주 그 표정과 눈빛을 보게 될지 걱정스럽네요. 더 딱한 건 오래전 다섯 살 때 하영범에게 이용을 당했던 것처럼 또 다시 성도희의 숙적 백설희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어렵겠지만 하인주라는 허울을 하루라도 빨리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길 바랍니다. 어쩌면 요리사의 길이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았으면 해요. 요리사의 길 역시 내 것이 아닌 허울일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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