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⑮ MK를 바라보는 정의선 부회장

[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제 역할모델은 현대자동차그룹을 일궈낸 정몽구 회장입니다. 정 회장께서는 현대차그룹을 세계적 브랜드로 키우며 한국경제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올 초 지인들과 가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에 대한 존경심을 이 같이 표현했다. 평소 정 부회장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절대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을 잘 알기에 지인들은 정 부회장의 '뜻밖의 발언'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날 정 부회장과 함께 했던 참석자들은 '정 회장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나온 주제였기에 정 부회장의 말을 일부러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 부회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회장께서 10여 년 전 현대차를 물려받았을 때 세계 5위의 자동차회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면서 "품질경영을 뚝심있게 밀어붙인 결과였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정 회장의 품질우선 경영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현대차의 도전정신"이라고 강조하면서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에서 비롯된 현대의 기업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언급했다.


워낙 아버지에 대한 말을 아끼는 만큼 이날 수차례 언급된 정 부회장의 멘트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 '뉴스'가 됐다.


2000년 현대차그룹이 출범하고 정 부회장이 차세대 리더로 부상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버지를 어려워한다. 외부는 물론이고 현대차그룹 내부 임원들조차 정 부회장이 정 회장을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아버지를 거론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이유는 정 회장이 현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데다 자칫 아들이 아버지를 평가한다는 식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의 차세대 리더라는 주위의 평가에 대해서도 정 부회장은 "회장님이 건재한 상황에서 쓸데없는 소리한다"며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그룹에 오래 몸담았던 한 전직 임원은 "아무리 측근이라도 정 부회장이 회장님에 대해 말한 것을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면서 "현대가(家)의 가풍을 고려하면 이해못할 사항도 아니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현대가에서는 오히려 아들이 아버지를 언급하는 게 이상한 문화"라고도 했다.


현대가는 엄격하고 군기가 센(?) 문화 때문에 아들은 차치하더라도 형제간에도 위계질서가 확실한 것으로 전해졌다. 몇 년 전 정씨 형제들이 식사를 할 때 일이다. 정몽구 회장의 참석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은 동생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형이 없는 관계로 정 명예회장은 길고 네모난 식탁의 상석을 차지했다. 한참 식사를 하는 도중 형인 정 회장이 도착하자 정 명예회장은 화들짝 놀라면서 자신의 수저와 밥그릇을 들고 바로 옆 자리로 비켰다. 정 회장의 한 측근은 "정씨 형제들은 정몽구 회장을 단순한 형이 아닌 아버지로 여길 정도다"고 전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거론하기는 더욱 어렵다. 2008년 한 신차발표 행사장에 정 부회장이 등장했다. 기아차 사장에서 현대차 부회장으로 옮긴 직후여서 기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기자들이 "아버지인 정 회장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자 정 부회장은 "우리 집안이 어떤지 알잖냐"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여느 집안과 달리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확실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위계질서를 알 수 있는 사례는 또 있다. 정 부회장은 현대차 부회장에 오르기 전까지 그룹 회장 전용기를 한번도 이용한 적이 없다. 기아차 사장 시절에도 전용기 이용은 꿈도 꾸지 못했다. 2009년이 돼서야 정 부회장은 전용기를 이용해 러시아 출장길에 올랐다. 전용기를 이용했다는 것은 그의 위상이 그룹내에서 커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부자의 관계가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정 부회장은 정 회장을 '아버지'가 아닌 '회장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올 초 미국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서 정 부회장은 한국 기자들과 짧은 만남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정 부회장은 현대차의 새 슬로건을 언급하면서 '회장님의 방침'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아버지 언급을 조심하는 정 부회장이지만 가끔 "존경한다"는 말을 지인들에게 내비친다고 한다. 하지만 말 보다는 행동으로 존경을 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 회장을 깍듯이 모신다. 그야말로 지극정성을 다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지난해 9월 반포 JW메리어트호텔. 정 부회장은 한국을 찾은 아놀드 슈워제네거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정 회장의 만남을 앞두고 호텔 로비를 서성거렸다. 약속시간 1시간 전부터 호텔 입구에 서서 정 회장을 기다렸다. 정 회장 도착 몇 분 전 쯤 미리 와 대기하는 식의 생색을 낼 수 있지만 정 부회장은 그렇지 않았다. 정 회장이 호텔에 도착하자 정 부회장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대여섯 발자국쯤 뒤로 물러난 후 정 회장을 따랐다.


또 정 회장이 해외 출장길에 오르거나 귀국할 때면 미리 공항 대합실에 도착해 배웅하거나 영접한다. 이 때도 최대한 예의를 갖춘다.


지난 5일 오후 정 회장은 서울 양재동 본사 1층 로비에서 한 지인과 함께 전시차를 둘러봤다. 정 부회장은 뒤늦게 그 자리에 합류했는데 약 5m 떨어진 거리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정 회장 뒤에 자리를 잡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이 주목을 받는 자리의 경우 정 부회장은 먼발치로 물러난다.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기도 한다. 아버지가 주인공인 자리에서는 이 같이 행동하는 게 자식의 당연한 도리라는 생각에서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아버지 정몽구 회장을 보좌할 때 마다 늘 몇 발자국 뒤로 떨어져 동행한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정 부회장을 비롯한 현대차그룹 고위임원들이 러시아 출장길에 오르는 정몽구 회장을 배웅하는 모습. 정 회장(좌)과 윤여철 현대·기아차 부회장(우) 사이에 정의선 부회장의 모습이 보인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아버지 정몽구 회장을 보좌할 때 마다 늘 몇 발자국 뒤로 떨어져 동행한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정 부회장을 비롯한 현대차그룹 고위임원들이 러시아 출장길에 오르는 정몽구 회장을 배웅하는 모습. 정 회장(좌)과 윤여철 현대·기아차 부회장(우) 사이에 정의선 부회장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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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 "내 리더십? 난 장삿꾼"
"한국경제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말하는 아들 정 부회장의 평에 아버지 정 회장은 본인을 어떻게 평가할까.


정 회장은 지난 17일 '본인의 리더십을 어떻게 보냐'는 기자의 질문에 "리더십은 무슨…난 자동차를 만들어 파는 장삿꾼이지"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한평생 자동차에 쏟아부은 집념이 묻어났다. 집념이 자동차의 품질을 높이고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렸으며 궁극적으로는 국가 경제에도 기여한 셈이다. 정 부회장이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언급한 것은 바로 이 집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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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부회장이 지인들과 가졌던 저녁식사 자리로 돌아가보자. 정 부회장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이 같이 밝혔다.


"힘들 때마다 창업정신을 되새긴다. 현대차그룹은 물론이고 항상 대한민국 경제를 위해 헌신하는 회장님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은 나의 큰 자산이다"
정 회장의 존재만으로도 정 부회장은 많은 격려와 위안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정 부회장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아버지인 정 회장은 그의 영원한 멘토다.


최일권 기자 ig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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