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반찬에도 간을 맞추는 하얀 쌀밥 같은 얼굴
특별한 색도 향도 느껴지지 않은 전도연의 얼굴은 매번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우리를 찾아오곤 했다. <해피엔드>의 바람 난 아내에게서는 어린 동생을 업고 고무줄 놀이를 하는 <내 마음의 풍금>의 홍연이는 없다. 눈 아래 깊게 패인 상처를 가리기 위해 낮이고 밤이고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피도 눈물도 없이>의 수진이도 마찬가지였다. 정지우 감독은 전도연의 소녀 같은 몸에서 뜨겁게 끓어오르는 여성을 발견해 내고, 류승완 감독은 그 순한 얼굴에서 날아오는 맥주병에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는 독한 기운을 불러냈다. 그렇게 천진난만한 열일곱 시골 소녀에서 주인을 유혹하는 하녀로, 불륜의 늪에 빠진 유부녀에서 돈 가방을 노리는 건달의 여자로, ‘사랑밖에 난 몰라’를 외치는 다방 아가씨에서 사랑 따윈 필요 없는 능수능란한 사기꾼으로, 전도연의 얼굴은 어떤 역할이든 감당해 낸다. 제 아무리 맵고 짜고 달고 신 반찬이 올려 진다 해도 기가 막히게 간을 맞추는 그 하얀 쌀밥 같은 얼굴로.
대중성과 실험성, 파격과 절제, 소녀와 여인
전도연은 사실 꿈이 없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가 되겠다는 꿈도, 전 국민의 가슴에 남는 일생일대의 연기를 해보겠다는 꿈도, 여기저기 상을 다 휩쓸고 다니고 싶다는 꿈도 없다. 그냥 내일을 위한 꿈을 꿀 시간에, 이 순간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미래가 아닌 현재, 남이 아닌 자기 자신과 가장 열정적인 연애에 빠져있을 뿐이다. “어릴 땐 평생 이 일을 하겠다든지, 배우로서의 뚜렷한 자의식도 없었어요. 그냥 내 얼굴이 TV에 나오는 게 좋았죠.” 베이비로션 광고 모델 때부터 남달랐던 맑고 깨끗한 피부 덕에 전도연은 여전히 생기 있는 ‘젊은 여자’로 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벌써 데뷔 20년이 훌쩍 넘은 ‘원로 배우’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그녀의 대표작을 쭉 나열하다 보면 꽤 흥미로운 그래프들을 발견 할 수 있다. <접속>에서 <약속>으로 <해피엔드>에서 <내 마음의 풍금>으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드라마 <별을 쏘다>로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스캔들>로 <인어공주>에서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으로, <너는 내 운명>에서 <밀양>으로, <하녀>에서 <카운트다운>으로, 전도연은 대중성과 실험성, 파격과 절제, 소녀와 여인, 흥행과 예술의 트랙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점점 자신만의 지름을 넓히고 높이를 올려갔다.
심은하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떠나가고, 이영애가 교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는 배우로서, 흥행과 시청률의 여왕으로서, 2007년에는 칸 영화제를 통해 합당한 권위까지 얻으며, 배우 전도연은 충무로에 자신만의 유일한 존재감을 확보했다. 애당초 그녀의 꿈이 무엇이었던 간에 한 시대의 영화 시장은 전도연으로 인해 다음 꿈을 꿀 수 있게 된 셈이다. 인과응보를 배반하는 아이러니의 현신. 전도연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배우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