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①
재산모두 처분 1933년 혈혈단신 '家出'
정치에도 큰 뜻…6·7대 국회의원 역임
$pos="L";$title="";$txt="해방 이후 이원만 회장이 일본 도쿄에 차린 삼경물산 사옥 전경";$size="272,448,0";$no="2010050310191288780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오운 이원만 회장은 풍운아 기질이 강했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이 땅에 나일론을 맨 처음 들여온 사업가라는 점만 같을 뿐, 아버지와 나는 너무 달랐다"고 술회했다.
아들보다 열여덟살 위인 아버지 오운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또 아내와 자식보다는 자신의 어머니만을 걱정한 인물이었다. 이 명예회장은 "아버지 비망록에 당신 어머니에 대해서는 3쪽을 할애했으나 아내와 자식에 대해선 딱 두 줄로만 표현했다"고 부친의 남다른 성품을 토로했다.
이 명예회장은 아버지의 가출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고 전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양반댁 자손에서 장삿꾼으로의 변신, 지식 탐구욕과 투지로 피 끓게 된 계기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코오롱을 설립하게 된 것도 바로 오운의 가출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오운은 1933년 아내와 자식을 남긴 채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남겨진 가족들로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고 고난의 시작이었다. 아내는 삯바느질을 했고 아들은 상점에서 돈을 벌어야 했다. 한창 민감한 사춘기 때인지라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커가면서 세상과의 인연을 접는 것이 최선이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고 이 명예회장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 명예회장은 결혼한 배경에 아버지의 배려가 있었다고 전했다. 일제시대 막바지였던 1943년 학도병 징집을 앞둔 상황에 오운은 아들에게 "결혼부터 하라"고 말했다.
아들마저 군에 가면 아내가 쓸쓸하니 며느리라도 말동무가 돼야 하지 않겠냐는 이유에서였다. 이 명예회장은 "어머니를 위해 결혼하라는 말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고 회고했다.
훗날 오운은 자신의 가출에는 세가지 동기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태몽과 소나무씨, 비학산(飛鶴山)이 그것이다. 오운의 어머니 태몽에 오색구름이 나타났는데, 바다를 건너 여러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원만 회장 호(號)인 오운(五雲)은 여기서 비롯됐다.
또 소나무씨는 어미나무 곁에서 멀어질수록 싹을 잘 틔우는데, 양반 자식이라도 부모 품에 안주하면 출세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비학산은 고향에 있는 산인데, 이곳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서 날개를 펴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오운은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안(기업) 보다는 밖(정계)에 관심이 많은 그의 풍운아적 기질 때문이었다. 제헌국회 시절 낙선하기도 했으나 1960년 참의원을 시작으로 1963년과 1967년 6대, 7대 국회의원을 연임했다.
'사내'였던 오운은 신용 또한 매우 중시했다. 1955년 8월 8일 이승만 정부가 돌연 일본과의 경제 단교를 선포하자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무역업을 하던 삼경물산은 곤경에 처하게 됐다.
판로가 막히니 구매 물량을 전부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오운은 "집을 팔아서라도 계약을 이행하라"고 지시했다. 물량 구입처인 일본 미쯔이에 신용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는 판단에서다.
결국 대구의 으리으리한 한옥을 팔면서 대금을 지불해야 했지만, 오래지 않아 단교 조치가 풀렸고 신용을 얻은 오운은 미쯔이에서 더 많은 섬유제품을 한국에 팔 수 있게 됐다. '장사에는 신용'이라는 진리를 보여줬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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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권 기자 ig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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