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의 나무 인간의 꿈을 꾸다<4>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한 산책



축령산 숲길을 걷다보면 백제의 '산수문전'에 나오는 한 산을 걷고 있는 듯하다. 백제의 '산수문전'은 깊은 골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위압적이기 보단 아늑하고 낙천적인 면이 있다. 숲길의 곡선은 삼나무와 편백나무의 직선을 돋보이게 하면서도 자칫 경직되기 쉬운 경관에 어떤 근원적인 리듬감을 선물한다. 그 리듬감에 휘감겨 보라.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의식으로부터 놓여나 다만 걷고 있다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지와 나 사이에 교감이 생기는 것 같다. 줄을 지어 보다 안전한 곳을 향해 이동하는 개미떼 앞에서 비를 예감하고, 낮인데도 잎을 살짝 오므리고 있는 자귀나무에게서 짙푸른 숲의 그늘을 느낄 수 있다. 이파리를 부비면 시냇물 소리가 나는 비목나무와 보라색에서 흰색 쪽으로 옮겨가는 산수국의 꽃빛으로부터,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수많은 뉘앙스로 천변만화하는 이파리들로부터 잠든 감각들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나기 위하여 한 생을 이렇게 끝없이 길 위에 있어야


사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얼마나 심신을 지치게 만드는가. 사물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이해하기 이전에 사물 그 자체를 즐기는 법을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다. 바람과 한참 연애 중인 상수리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춰본다. 만난 지 얼마 안된 듯 바람과 잎은 한참 서로를 향해 머금은 연정을 수줍게 풀어놓고 있다. 마치 단원의 '마상청앵도'에 나오는 고개를 외로 튼 꾀꼬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말고삐를 쥐고 고개를 트는 선비처럼 좀처럼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어떤 한 순간과 자신이 정면으로 딱 마주쳤을 때의 실감을 마음에 인화시키고자 한 흔적이 곧 사진이고 그림이고 시가 아닐까. 어쩌면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나기 위하여 한 생을 이렇게 끝없이 길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늘한 삼림욕장에 들면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 때문에 정신이 맑아진다. 특히 나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피톤치드를 자랑하는 편백나무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전국의 삼림욕장 중에서도 왜 축령산을 으뜸으로 치는 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수원지의 물을 마시듯 우리는 숲빛을 눈으로 흡입한다. 숲이 내뿜는 신선한 날숨을 허파꽈리 가득 들이마시고서 몸속을 박하향처럼 환하게 환기시킨다. 그리고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 듯 숲속으로 뛰어들어 마음의 때를 뽀득뽀득 벗겨낸다. 울울창창 숱하게 우거진 나무들의 목욕탕을 들락날락 몸을 담그다 보면 쭈글쭈글했던 마음의 피부가 한결 탱탱해져온다. 아픈 사람들이 특히 많이 찾는다고 하는 편백나무를 한번쯤 나도 주치의로 삼아보고 싶어진다.


편백나무 둥치에 한참 등을 기대고 있자 문득 편백나무 그림을 즐겨 그렸던 고흐의 '실편백나무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이 생각났다. 병과 싸워 이기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기력이 다할 때까지 그림을 그린 생레미 요양원 시절 고흐는 편백나무로부터 큰 위안을 얻었다. 빠르고 짧은 붓질이 마치 거센 교향곡처럼 울려퍼지는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떨치고 약동하는 벅찬 생명감 같은 것을 수혈 받게 된다. 옛 사람들이 12율의 기본음을 왜 ‘임종林鐘’이라고 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생명으로 가득찬 나무가 모인 숲이 그 생명의 숨결을 드러내는 음악의 근본음이 아니면 무엇일까.


숲은 가히 모든 문화의 기원이라고 할 만하다



아마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베토벤은 빈 근교의 숲을 거닐었을 것이다. 심한 청각장애를 앓고 있던 그에게 숲이 없었다면 ‘전원교향곡’은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여, 숲속에 있을 때 저는 행복합니다. 여기 서 있는 나무들은 모두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 보건대, 숲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곧추선 영혼의 귀를 뚫리게 해 준 것으로 보인다. 어디 베토벤만이 그럴까.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숲이 없었다면 우리는 밀레나 코로 그리고 루소와 같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숲은 가히 모든 문화의 기원이라고 할 만하다.


예부터 이런 진실을 직관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던 우리 선조들은 숲을 신성시했다. 단군신화나 박혁거세의 신화가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도, 태조 이성계가 개국과 동시에 그 당대의 그린벨트라 할 수 있는 금산제도를 시행한 것도 다 그런 맥락에서다.


언젠가 누군가 저 숲의 자원 중 무엇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약초가 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숲의 가치를 평가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숲의 의학적 가치를 따지는 식으로 숲을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숲의 경제적 가치를 따지는 식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숲은 우리의 약이 아니고 돈도 아니다. 숲은 그저 숲으로서 우리를 돕고 있는 것이다. 시에틀 추장의 말대로 어떻게 저 하늘과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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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히 2시간쯤이면 걸을 수 있는 휴양림 숲길을 걷고 있자니 서울에서 듣던 매미 울음이 한결 정겹게 다가온다. 숲에서 매미 울음소리는 있는 듯 없는 듯 다른 소리들 속에 스며들어 들려온다. 여기서는 살아야겠다고 아등바등 자신을 굳이 표 나게 내세울 이유가 없다. 나뭇잎 스적이는 소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 새들이 날개를 터는 소리와 어울려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곳이 숲이다. 수굿해진 매미울음처럼 사납게 일렁이던 마음결도 사뭇 부드러워진 것 같다.


편백나무는 음향 조절력을 지녀서 음악당 내장재로 인기가 높다는데 아마도 내 안에 음악당만한 공명통이 생긴 모양이다. 잔잔하게 파문져가는 저 매미 울음소리를 이제 누구에게 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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