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Y. 캠벨·타룬 라마도라이 '설계된 판'
친절한 설명과 복잡한 상품 사이, 금융은 누구의 편에 섰나
나만 몰랐고 누군가는 알고 있었던, 오래된 '금융의 비대칭'
은행 창구의 말은 늘 부드럽다. 직원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상품 설명서는 합리적인 척한다. 그런데 사람을 망하게 하는 건 대개 노골적인 사기가 아니라, 사기처럼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구조다. '설계된 판'은 바로 그 점을 찌른다. 왜 어떤 사람은 금융에서 자꾸 지는가를 묻지 않는다. 왜 그렇게 지게 만드는 판이 멀쩡한 제도처럼 오래 유지되는가를 묻는다. 저자들이 제목에 도발적인 단어 '설계(fixed)'를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금융은 공정한 시장이 아니라, 잘 아는 소수와 파는 쪽에 더 유리하게 기울어진 장치다.
책이 서문에서 한국을 먼저 끌어오는 대목은 영리하다. 교육 수준이 높고, 금융시장도 촘촘하고, 규제도 약하지 않은 나라에서조차 개인금융이 평범한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면, 문제는 몇몇 투자자의 무지로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예외가 아니라 증거가 된다. ELS와 DLF 같은 사건은 여기서 "조심했어야 할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복잡한 구조, 흐린 정보, 판매 인센티브, 그리고 '은행이 권했으니 괜찮겠지'라는 신뢰가 한데 얽혀 어떻게 손실을 제도처럼 배분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존 캠벨과 타룬 라마도라이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단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캠벨은 오래전부터 가계금융을 금융경제학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 의제로 밀어 올린 학자였고, 라마도라이는 신흥시장의 생활세계에서 금융 판단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추적해온 연구자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왜 돈 문제에서 멍청한 선택을 하는가"를 훈계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가계가 마주하는 금융의 환경 자체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그래서 실수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 된다는 점을 오래 연구해왔다.
개인금융이 오래 숨겨온 말은 위험이 아니라 선택이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자유롭다고, 비교할 수 있을수록 합리적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익숙한 문장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선택이 많다는 것과 잘 고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상품 구조, 잘게 쪼개진 수수료, 핵심을 흐리는 설명 방식은 자유를 넓히는 장치라기보다, 개인에게 책임을 넘기는 기술에 가깝다. 선택은 많아졌지만, 이해는 그만큼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시장은 바로 그 틈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다.
문제의 핵심은 분노보다 구조다. 예컨대 저자들은 운이 실력으로 오인되는 순간을 집요하게 본다. 책에 실린 설명처럼, 한두 종목에 몰아넣는 위험한 전략도 운 좋게 오래 맞아떨어지면 사람은 그것을 실력으로 믿게 된다. 인도 투자자 데이터를 다룬 이들의 연구에서도 수익률 격차가 자산 불평등 확대의 큰 몫을 차지했고, 좋은 성과를 우연히 얻은 투자자는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금융은 여기서 지식의 시장이기 전에 착각의 시장이 된다. 많이 아는 사람만 이기는 시장이 아니라, 운 좋게 맞은 사람의 확신이 다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시장이다.
책이 더 날카로운 건 해법에서도 드러난다. 금융교육을 더 하자, 설명을 더 붙이자, 기본설정을 조금 바꾸자는 말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자들은 그런 약한 처방으로는 판이 바뀌지 않는다고 본다. 책이 끝내 밀어붙이는 것은 '넛지보다 쇼브'다. 사람더러 더 똑똑해지라고 요구하는 대신, 애초에 크게 실수하기 어려운 상품 구조와 선택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설계된 판'은 흔한 금융 교양서와 갈라진다. 자기계발서가 아닌, 제도 설계론처럼 읽힌다. 개인의 태도를 고치자는 책이 아니라 금융의 기본값을 바꾸자는 책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 책이 독자를 함부로 꾸짖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융서의 상당수는 손실을 본 사람에게 공부가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틀렸을 수는 있지만, 당신만 틀리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쪽에 더 가깝다. 그 차이가 크다. 책임을 지우는 책과 구조를 드러내는 책은 전혀 다르다.
사람들은 손실보다 모욕에 더 오래 다친다. 나만 몰랐고, 누군가는 알고 있었다는 감각 때문이다. '설계된 판'은 바로 그 모욕의 구조를 추적한다. 사람들은 늘 금융을 모르는 개인을 탓해왔지만, 그동안 금융은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더 많은 돈을 벌도록 짜여 있었다. 그러니 이 책의 결론은 단순하다. 개인에게 현명함을 더 요구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게 먼저 공정함을 요구해야 한다. 판이 기울어졌다면, 공부보다 수평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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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된 판 | 존 Y. 캠벨·타룬 라마도라이 지음 |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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