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팬데믹때 동원...흔들리는 '페트로 달러'에 다시 꺼낸 통화스와프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17일(현지시간) 미국 재무부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 양자면담에 앞서 악수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재정경제부
2008년 리먼 사태 직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달러 부족에 시달리는 외국은행들을 살리기 위해 조용히 외국 중앙은행에 수천억달러를 쏟아부었다. 그 수단으로 사용된 게 통화스와프다. 통화스와프는 두 나라의 돈을 맞교환할 수 있는 계약이다.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낼 쓸 수 있어 '외화 마이너스 통장' '외화 유동성 안전판' 등으로 불린다. 리먼 사태 당시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을 이끌었던 신제윤 기획재정부(현 재정경제부) 차관보는 '한미 통화스와프'의 의미를 주한미군 주둔 효과에 비유했다. 실제 통화스와프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더라도 한미 간 스와프 체결 자체만으로 외환시장 위기에 대한 강력한 억제력과 신뢰 효과가 생긴다는 의미에서다.
당시 체결된 통화스와프 규모는 300억달러. 당시 한국의 한 달 수출액이 300억달러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 어떤 조치보다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나 내려도 곤두박질치던 우리 금융시장은 통화스와프 한방에 즉각 반응했다. 체결 소식이 전해진 뒤 하루 만에 원·달러 환율은 177원이 떨어졌고, 주가도 12%나 치솟았다. 2020년 팬데믹 때도 미국과의 600억달러 통화스와프 체결로 위기를 넘겼다. 두 번의 통화스와프는 15~18개월 이어졌지만, 실제 빌려 쓴 기간은 83일로 초단기였다. 주한미군이 주둔한다고 반드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억지력으로 의미가 있듯, 스와프도 활발히 쓰이지 않더라도 시장의 신뢰를 확보하는 심리적 안전판 역할을 한 셈이다.
두 번의 스와프가 우리 외환시장에 든든한 안전판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만큼이나 미국의 필요가 작용했다. 한국을 비롯해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신흥국들의 외환보유고의 상당 부분은 미국 국채로 이뤄져 있다. 이들이 시장 불안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헐어 미 국채를 대량 투매하고 달러 돈줄이 마른 다른 신흥국들의 미국 국채 매각이 도화선이 되면 미 국채 가격 폭락과 금리 급등으로 미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이때 한국 외 미국과 스와프 협정을 맺은 브라질, 멕시코, 싱가포르 등은 모두 외환보유액 상위 국가들이었다. 금융위기 당시 강만수 기재부 장관이 신흥국 위기가 다시 선진국으로 전이될 수 있다(리버스 스필오버)는 논리를 설파해 체결을 성공시켰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금융위기나 금융위기에 준하는 비상 상황에서 달러 부족으로 인한 외부 위험의 전이를 막기 위한 미국의 조치가 통화스와프였던 셈이다.
이번 중동 전쟁의 충격파가 큰 국가들과 미국이 통화스와프 확대에 나서는 배경에도 '자국의 이익'이 먼저 작용했다. 이란 전쟁 대응에 달러 돈줄이 마른 국가들이 외환보유고를 헐어 미 국채 투매에 나서게 되면서 그 위기가 다시 미 금융시장으로 전이되는 걸 막겠다는 계산이다. 여기에 더해 이번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폐쇄로 페트로 달러 체제의 위상에 균열이 커진 미국이 스와프 라인을 확대해 중국의 위안화 세력화에 대항하려는 의도도 숨어있다. 다만 중앙은행 간 통화스와프 체결이 미 금융시장과 구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국가에 한정돼 제공되는 만큼 미 재무부의 독자적 지원 수단인 환율안정기금(ESF)를 통한 대안적 스와프가 활용될 가능성도 타진된다.
한미 간 통화스와프 체결 가능성이 거론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3500억달러 대미투자 협상과 연계한 통화스와프 체결을 위해 양국이 줄다리기를 벌였으나, 한국 정부에 달러가 부족하지 않다는 미국 정부의 인식 탓에 체결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은 당장 달러 유동성이 시급한 상황도 아니다. 환율 방어용 실탄인 외환보유액(4236억6000만달러)은 국제통화기금(IMF) 권고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탄탄하고, 외환보유액과 비슷하게 환율방어에 도움이 되는 순대외금융자산도 1조달러 이상의 흑자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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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3500억달러 대미투자와 중동 전쟁이라는 대외 악재가 겹쳐있는 가운데 통화스와프 체결은 시장 심리와 환율 방향성에 뚜렷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원·달러 환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게 자국 이익에 더 부합한다고 보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베선트 재무장관이 두 차례나 한국 외환시장에 대해 이례적으로 구두개입성 메시지를 내놓은 것도 그만큼 양국 경제협력에서 원화의 안정적 흐름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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