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가 깔고 엔비디아가 세운 '철옹성'
전략 요충지이자, 지정학적 리스크 분산
대만 중심 AI 주도권 재편하는 젠슨 황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5' 전시회를 엔비디아와 대만 기업들의 잔치로 만들었다. 대만 기업들과 인공지능(AI) 슈퍼컴퓨터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밝혔고, 거대한 규모로 들어설 대만 신사옥 부지도 공개했다.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애정을 넘어 AI 주도권을 대만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전략적 판단으로 분석된다.
젠슨 황 CEO는 대만 도착 이튿날인 지난 17일 저녁 타이베이 시내 한 전통식당으로 협력 업체들을 불러 모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이 멤버 안에서는 속이거나 싸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엔비디아는 기술 공급을 끊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비공개 연회에는 웨이저자 TSMC 회장부터 차이리싱 미디어텍 CEO, 배리 램 콴타 회장, 조니 시 에이수스 회장, 퉁즈셴 페가트론 회장, 린셴밍 위스트론 회장 등 대만을 대표하는 글로벌 반도체·전자·제조 기업 11곳의 수장들이 집결한 것으로 파악됐다. 황 CEO의 농담 섞인 경고에는 '엔비디아 생태계' 안에서는 경쟁하지 말고 함께 성장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들 기업은 사흘 뒤 개관한 '컴퓨텍스' 무대에서 보란 듯이 엔비디아와 협력한 AI PC, 그래픽처리장치(GPU) 서버, 산업용 솔루션 등을 앞다퉈 전시했다. 엔비디아가 새로운 칩을 발표하지 않아 각국 취재진은 김이 빠졌지만, 현지는 뜨거웠다. 젠슨 황과 광기를 뜻하는 인서니티(insanity)를 합친 젠서니티(Jensanity)라는 신조어가 황 CEO에 대한 열광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젠슨 황 CEO는 왜 이렇게 대만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단행할까. 고향이라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현재 그의 국적은 엄연히 미국이다. 업계에선 엔비디아가 부르는 '대만 찬가'의 이유로 ▲TSMC ▲전략적 요충지 ▲지정학적 리스크 분산 등을 꼽는다. TSMC가 판을 깔고 엔비디아가 쌓아 올린 '타이완 클러스터'는 철저히 전략적 계산이 깔린 결과라는 분석이다.
현장에서 만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가 어렵던 시절 TSMC는 낮은 가격에 웨이퍼를 공급하며 엔비디아·미디어텍·리얼텍 등 회사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며 "그 중 엔비디아의 GPU가 AI라는 '때'를 만나 리더로 올라선 것"이라고 평가했다. TSMC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으로 지금도 엔비디아의 칩 대부분을 독식하고 있다.
대만은 엔비디아가 전략적 거점으로 삼기에도 적합하다. 대만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독립성이 높기 때문이다. TSMC뿐만 아니라 애플(Apple) 아이폰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전자제품 위탁생산 업체 폭스콘, 미디어텍, 기가바이트 등 대만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으로 몸집을 키운 만큼 이 안에서 공급망이 구성된다.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하는 측면도 있다. 황 CEO는 20일 GTC 타이베이 글로벌 간담회에서 "미국의 수출 통제는 실패했다"며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미 행정부의 대중 규제로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떠안았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상당한 매출을 올려온 엔비디아에 AI 컴퓨팅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대만은 미·중 갈등을 넘어설 새로운 시장으로서 투자 가치가 높다.
이런 요인들을 종합하면 황 CEO가 이번 컴퓨텍스에서 공개한 대만 신사옥 컨스텔레이션(별자리)은 대만을 중심으로 AI 주도권을 재편하려는 그의 의지가 드러난 첫걸음으로 볼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존의 반도체 설계·생산 외에 데이터센터, 시스템, 로봇, 나아가 슈퍼컴퓨터까지 엔비디아 생태계를 대만 내에서 '완결형'으로 구성하겠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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