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대중이 '유익함'보다 '무해함'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누운 채로 모빌을 바라보는 갓난아기, 어설프게 종종 걸어가는 강아지를 보며 '귀엽다'가 아니라 '세상 무해하다'라는 반응으로 환호한다. 카리스마 있거나 힘이 느껴지는 얼굴 대신 말갛고, 선량한 이미지의 연예인들이 광고시장에서 선택받는다.
어딘가 하찮지만 악의 없고 순수한, 그래서 아무런 위기감도 불러오지 않는 캐릭터가 이 '무해함'의 전형이다. 이러한 세간의 트렌드에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던 한 공공기관의 간부도 최근 대화를 나누던 중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요즘엔 조직을 깨뜨릴 것 같은 사람은 뽑지 않는다. 차라리 적당한 선에 있는 무해한 사람을 선호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대형 미디어커머스 기업(CJ ENM)도 올해의 콘텐츠 키워드로 '무해력'을 꼽았다. 어떤 편의점(CU·BGF리테일)은 올해 밸런타인데이 제품 방향을 '무해력'으로 정했다고 하니 참으로 광범위한 소구점이다. 미디어와 편의점이 나섰다면 사실상 모두를 사로잡은 콘셉트 아닌가.
내게 도움을 주는 것보다 해 끼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이 특이한 기호는 무엇을 말해주나. 득이든 실이든 그 어떤 것도 내게 가지고 오지 말기를, 밀지도 당기지도 말고 그 자리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적당한 거리감이 확보돼야 편안한 세태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조금 과장해 생각해보면 끝없이 유해한 사건과 영향력에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뉴스는 그야말로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와 '윤석열', 이 두 대통령이 차지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행정 명령에 서명한다. 서명마저도 자신을 닮아 존재감이 넘치고 복잡하다. 철저히 나의 이익에 맞춰 계산하고, 상대가 겪을 후폭풍엔 관심이 없다. 밀어붙이고 찍어 누르는, 유해함의 전형이다. 그간 우리나라의 성장동력이던 반도체, 자동차, 철강 산업을 모두 겨누고 있으니 관련 산업 종사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얼마 전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은 "우리나라 특정 지역을 미국령으로 두는 것 외에는 답이 안 나온다"고 농담했다.
윤 대통령은 인원이니 의원이니 하며 지리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조용하던 법원 앞은 탄핵에 대한 찬반으로 시끄러운 아귀다툼의 현장이 됐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헛물켤까 무서운 공무원들은 몸을 더욱 움츠리고, 미국에 곳간을 다 내어주게 생긴 기업인들은 골치가 아프다. 한 고위 공무원은 "이런 분위기가 쭉 이어지며 올해 상반기가 끝나버릴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 두 인사들은 복사해 붙여넣은 것처럼 매일 지치지도 않고 많은 사람의 정신 건강에 해를 끼친다. 이런 스트롱맨을 일상처럼 보다 보면 조개 하나를 손에 꼭 쥐고 물 위를 부유하는 보노보노처럼 살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유해함에 시달린 끝에 '무해함'이 주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필요한 사람들. 모두에게 '무해한' 하루가 반복되길 바란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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