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 '양심'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중략)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생태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이라고 했다. 1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새 책 '양심'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였다.
최 교수는 "우리 사회가 다시 양심을 얘기하고,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개인들이 모여서 사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책을 냈다"고 했다.
최 교수는 740만 구독자를 보유한 '최재천의 아마존'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다. 유튜브에는 300개가 넘는 동영상이 게재돼 있다. 최 교수는 영상 한 편을 찍는데 1시간30분~2시간가량 촬영을 한다. 하지만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은 10여분에 불과하다. 최 교수는 300개 동영상 중 양심과 관련된 동영상 7개를 골라 동영상에 다 담기지 않은 내용을 책에 풀었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점점 사라져가는 듯 하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미국 유학을 가기 전 청년 시절, 그리고 소년으로 대한민국에서 살 때는 양심이라는 단어를 매일 일상 대화에서 듣고 살았다. 어느날 생각해 보니까 우리 일상 대화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사라졌다고 느꼈다. 비양심적으로 살아도 크게 비난받지도 않고 심지어 비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게 보기 불편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계속 끌고 가면 우리 삶은 점점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양심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최 교수는 지난해 자신이 번역한 네덜란드 태생의 동물행동학자 프란스 드 발의 저서 '공감의 시대(원제: The Age of Empathy)'에 나온 내용을 언급하며 양심이 포유류라면 모두 지니고 태어나는 본성이라고 했다. 프란스 드 발에 따르면 생쥐 여러 마리를 칸막이로 구분해 가둔 뒤 한 마리에게만 먹이를 줄 경우 그 생쥐도 결국 먹이를 먹지 않게 된다. 옆에 있는 다른 생쥐들이 배가 고파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양심이 우리의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촛불이라고도 했다.
"2023년 서울대 하기 졸업식에서 축사를 할 때 양심을 촛불이라고 말했다. 내 마음속에 작은 촛불이 하나 타고 있는데 이 양심이라는 촛불은 불어도 불어도 꺼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은 태생적으로 비겁한 사람인데 자신의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양심이라는 촛불 때문에 호주제 폐지,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 반대 등에 나섰다고도 했다.
최 교수는 양심의 여부에 따라 공평과 공정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공평에 양심이 더해져야 공정이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공정과 공평을 설명하기 위해 키 차이가 나는 세 사람이 담장 너머 야구 경기를 보는 유명한 그림을 언급했다.
그림에서 세 사람 중 야구 경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키가 가장 큰 사람뿐이다. 세 사람이 나무상자를 하나씩 딛고 올라서며 키가 중간인 사람도 야구 경기를 볼 수 있게 된다. 세 사람에게 똑같이 나무상자를 하나씩 딛고 올라선 상황이 '공평(Equality)'이다. 다만 이때도 키가 가장 작은 사람은 야구 경기를 보지 못한다. 이에 키가 가장 큰 사람이 자신의 나무상자를 키가 가장 작은 사람에게 양보하고, 키가 가장 작은 사람이 나무상자 두 개를 딛고 올라서면서 세 사람이 모두 야구 경기를 볼 수 있는 상황이 '공정(Equity)'을 뜻한다.
최 교수는 공평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야구 경기를 보지 못하는 키가 작은 사람을 보며 느끼는 불편한 마음이 양심이며 비로소 공정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에서 공정이라는 말을 남발하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공정이라기보다는 기껏 잘 봐줘야 공평 정도의 상황인 경우가 많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줄 수는 없으니까 그저 똑같이 주고 우린 할 만큼 다 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약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받은 사람이 양보해서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 경우 적극적인 양보가 필요한데 그 양보를 탄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키 큰 사람은 자신의 상자를 키 작은 사람에게 양보해도 충분히 경기를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보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공론이 장이 자유롭게 열리기를 바란다."
최 교수는 최근 사회적으로 혼란이 커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양심의 문제에 비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심을 지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철저하게 개인이 기준이 때문이다. 자기 자신만 통제할 수 있으면 양심을 버리고도 충분히 살 수 있다. 내가 세상을 다 속였는데 딱 한 명을 속이지 못한다. 그 한 명이 바로 저 자신이다. 우리 중 상당수는 저 자신을 속이지 못해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나랏일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 양심의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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