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력기기 업계에선 HD현대일렉트릭이 조만간 임직원들에게 지급할 성과급이 화제를 모았다. 성과급 규모가 기본급의 1200%로, 지난해 최대 실적을 기록한 SK하이닉스(1000%)보다도 높았다. 익명 게시판인 블라인드에서 HD현대일렉트릭 성과급 루머가 나돌자 경쟁사들 경영진까지 긴장할 정도였다. "우리도 HD현대일렉트릭만큼 달라"는 직원들의 요구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경쟁사 고위 관계자의 멘트도 전해졌다.
성과급 규모가 큰 건 당연히 실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금융정보제공업체 FN가이드에 따르면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매출 3조5155억원, 영업이익이 7132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해 순이익은 5318억원으로 전년보다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년간 주가는 370% 이상 올라 코스피 종목 1위에 올랐다. 변압기 일감은 2030년까지 꽉 찼다. 그야말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HD현대일렉트릭 실적 호조는 단연 전세계적인 바람을 타고 있는 인공지능(AI) 영향이 컸다. 전력수요 증가로 전력기기 등 인프라까지 동반 호황을 누리면서 이 회사의 주력품목인 초고압변압기가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 내에선 "불과 5~6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라는 반응이 나왔다.
HD현대일렉트릭은 2017년 현대중공업의 인적분할로 탄생했다. 전기전자사업본부의 후신이다. 이 회사가 분사 직후부터 실적이 호조를 보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호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동종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중동지역 매출 의존도가 높았다. 사우디아라비아 변압기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동 국가들의 전력기기 투자가 둔화하면서 실적 악화로 이어졌다. 2018년과 2019년 영업손실이 각각 1006억원과 1567억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2년간 누적 적자는 2500억원을 넘었다.
HD현대일렉트릭이 극적 반전을 이룬 건 2020년 이후다. 시장에선 구조조정과 수주가 되살아난 덕분이라는 평가가 많다. 더 근본적인 배경을 따져본다면 미중 갈등 과정에서 등장한 ‘에너지 안보’를 빼놓을 수 없다.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토대 위에 경제적 타당성 등을 따져야 한다는 개념이다. 에너지 안보에서 변압기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미국에선 안보상의 이유로 중국산 변압기 사용을 제한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이 장치가 외부세력에 의해 조작되거나 꺼질 수 있고, 이 경우 사회에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미국 전력 전문가들의 견해다.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에서 HD현대일렉트릭을 포함한 한국산 변압기가 잘 나가는 배경이다. 이 회사 조석 부회장도 지난해 한 강연에서 "탈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에너지 안보가 국가 생존권을 좌우하는 시대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K-전력기기 메이커들의 실적 호조는 중국제품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다른 업종에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산은 기초소재는 물론 배터리, 전기차, 가전 등 우리 생활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다. 내 정보가 언제 어떻게 넘어갈지 모른다는 불안도 함께 한다. 불확실성으로 시작부터 불안한 2025년. ‘안보’라는 글로벌 담론이 우리에겐 돌파구가 될 것이다.
최일권 산업IT부장 ig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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