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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松堂의 나무, 그 뿌리는 백성에 닿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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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박영의 선산 모과나무

나무를 심는 데는 까닭이 있다. 농경문화 시절, 일상적으로 나무를 심고 키웠다 해서 까닭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를테면 선비의 가문을 상징하기 위해 심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다가올 미래의 화평을 기원하며 하늘에 이승의 뜻까지 전하기 위해 심은 나무도 있다. 또 당장 곁에서 쓰러지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심은 나무도 있다.


경북 구미 선산읍 신기리 풍광 좋은 언덕 마루의 '송당정사'라는 아름다운 옛 정자 앞에 그런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무신으로 입신출세하기 시작해 나중에 성리학자로, 급기야 한의학자로 다채롭게 살다 간 송당(松堂) 박영(朴英ㆍ1471~1540)이다. 그가 심은 나무는 모과나무다. 가문의 상징이랄 수 있는 모과나무를 지금 정성껏 지키는 사람은 그의 19대손 박혁진(朴赫鎭·65)씨다.

"이 모과나무는 송당 할아버지의 학문에 대한 입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특별한 나무입니다. 그가 무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생명을 존중하는 실천성리학자이자 한의학자, 의사로서 손수 심은 나무거든요."


이곳 구미 선산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박영은 스무 살이 갓 넘은 1492년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그는 무관으로 공을 떨쳤다. 하지만 학자로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문신으로 변신하는 꿈도 갖고 있었다.


"문신들 앞에서 무인이 밀릴 수밖에 없었죠. 그걸 늘 아쉬워 하셨던 모양이에요. 박영 할아버지는 양녕대군의 외손이었어요. 그러니까 왕손의 한 명으로 다른 왕손들처럼 천하를 쥐락펴락할 문인의 지위에 오르려는 욕구가 있었겠지요."

박영이 무관 벼슬을 버리고 고향 구미 선산 지역에 돌아와 지은 송당정사. 1496년에 짓고 1860년대에 중건한 것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64호.

박영이 무관 벼슬을 버리고 고향 구미 선산 지역에 돌아와 지은 송당정사. 1496년에 짓고 1860년대에 중건한 것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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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 내려놓고 낙향 후 송당정사 건립…성리학에 매진하던 중 한의학에 몰입
구토·설사·위장병 등 백성들이 흔히 겪는 질환에 효험이 있는 모과나무 심어
직접 심은 나무는 이제 없지만 뜻 기리려는 후손과 후계목은 여전히 그 자리에

후손으로서 선조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는 박혁진씨의 말끝에도 아쉬움이 묻어 있다. 무관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박영은 무과 급제 3년 뒤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우선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언덕 마루에 송당정사라는 집을 지었다. 이후 학문 탐구에 몰입했다.

문인으로 기초부터 다져야 했던 박영은 신당(新堂) 정붕(鄭鵬·1467~1512)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정붕은 고향 마을에서 조선 성리학의 정통 학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붕은 박영의 열의를 받아들였다. 박영은 자기보다 네 살 연상인 정붕을 스승으로 삼고 학문에 매진했다. 박혁진씨는 선조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스스로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건지, 아니면 워낙 성격이 지독했던 건지, 공부는 정말 독하게 한 모양입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정붕의 도움으로 '대학'을 읽기 시작했는데, 무려 2만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그 덕에 송당 할아버지는 인근에서 '대학동자'라고 불렸다고 해요."


조정은 박영의 출중한 능력에 대해 알고 있어 수시로 그를 불러냈다. 박영은 벼슬자리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위 관직을 자기의 사정과 입장에 맞춰 내치기도 했다. 하지만 왜구의 침입 등 나라에 위험이 닥쳤다고 판단되면 서슴없이 칼을 들고 나서는 천생 무인이었다. 조정의 잦은 부름으로 송당정사에 머무는 기간보다 고향을 떠나 지낸 시기가 더 길었다.


박영이 한의학과 의술로 학문의 폭을 넓힌 건 고향으로 돌아와 성리학에 열중하던 즈음이었다. 그는 전장의 지휘관으로 지내면서 사람들의 생과 사를 몸소 마주하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야 했다. 이런 그로서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 만큼 요긴한 학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천성리학'이랄 수 있는 분야에 몰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의술, 다시 말해 한의학 탐구에 매진했다. 이미 적지 않은 부상자 치료 경험을 가진 그는 의술 공부에 효율이 높았다. 인근에 효험 있는 명의로 이름을 알리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박영은 '경험방(經驗方)', '활인신방(活人新方)' 같은 한의학 관련 주요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나중에는 내의원(조선시대에 왕의 약을 조제하던 관청) 제조를 역임했다. 독학으로 성취한 그의 한의학 경지가 이미 높은 수준이었음을 증거하는 예다.


"요즘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융합학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 귀결점이 사람을 살리는 데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자랑스러운 선조의 후손인 박혁진씨의 자부심은 나무 이야기로 이어진다. 박영은 의술로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나무도 심었다. 모과나무였다. 많고 많은 나무 가운데 모과나무를 택한 건 약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모과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없지만 예로부터 약재로 요긴하게 쓰였다. 특히 기침 감기를 비롯해 구토ㆍ설사와 위장병에 효과가 좋았다. 이들 질병은 백성들이 흔히 겪는 질환이었다. 하지만 당시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었다. 박영은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더 평안하게 보살피고 싶었다. 특별한 질병이 아니라 가장 흔한 병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것이 모과나무를 선택한 까닭이다.


중국 전설의 명의 동봉(董奉)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동봉은 치료 대가로 환자들에게 자기 집 주변에 살구나무를 심게 했다. 위중했던 사람에게 다섯 그루, 가벼웠던 환자에게는 한 그루씩을 권했다. 얼마 뒤 동봉의 집 주변은 살구나무 숲을 이뤘다.


동봉은 마침내 선한 의사의 상징이 됐다. 그 뒤로 '의로운 의사'를 살구나무 숲이라는 뜻으로 '행림(杏林)'이라 부르기도 했다. 의과학자들의 축제를 '행림제'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박영의 공을 기리기 위해 허목이 짓고 손수 쓴 박영 신도비.

박영의 공을 기리기 위해 허목이 짓고 손수 쓴 박영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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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이 심은 나무는 한 그루가 아니었다. 약재로 삼을 까닭에 여러 그루를 심었다. 생육 조건 가리지 않고 잘 자라는 모과나무는 송당정사 주변에서 '동봉의 행림'처럼 숲을 이뤘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지금 남아 있는 한 그루의 모과나무가 박영이 심은 그때 그 나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영이 심은 나무라면 적어도 500년은 넘은 나무여야 한다. 하지만 송당정사 입구에 근사한 수형으로 살아 남은 모과나무는 250년 쯤 된 것이다. 박영이 키우던 나무의 후계목인 셈이다. 후손들이 선조의 귀한 뜻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지켜낸 나무다.


무관이자 성리학자이며 의학자인 박영의 뜻을 품고 대 이어 그의 살림터까지 지키고 서 있는 모과나무는 높이 10미터까지 자랐다. 줄기는 뿌리 부분에서부터 이미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사방에 고르게 펼쳤다. 모과나무 특유의 매끄러운 수피에 얼룩 무늬도 선명하다.


모과나무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잘 자란다. 하지만 이만큼 아름다운 수형으로 자란 모과나무를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산림청이 지난해 10월 이 모과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조의 뜻을 오래 보전하려는 후손들의 극진한 노력이 보상받은 듯하다.


"워낙 풍채도 좋았고, 스스로 건강관리를 철저하게 하신 분이어서, 당시로서는 장수했다고 할 70세까지 사셨어요. 게다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현직에서 일하시다가 순직하셨지요."


같은 학맥인 사림파의 이언적(李彦迪·1491~1553)은 박영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며 "하늘이 사문을 버리지 않아(天不喪斯文)/이 땅에 사람이 있었다(東隅尙有人)"로 시작하는 장편의 만시(挽詩)를 남겼다. 여기서 이언적은 박영과 관련해 "학문 탐구에 오묘함이 있었으며(窮探極遐妙)/높고 지순한 경지에 들었다(高步入眞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약물을 활용하고(活人憑藥餌)/나라의 아픔을 경륜으로 바로잡았다"며 그의 공을 칭송했다.


그로부터 다시 130여 년이 흐른 1540년, 영남 지역 성리학의 학맥 계승자인 문보(文甫) 허목(許穆ㆍ1595~1682)은 박영과 관련해 장문의 비문을 손수 써서 송당정사 앞에 세웠다. 허목은 박영을 '군자의 표상(君子之表)'이라 칭하고 그의 학문이 '하늘과 인간의 가르침을 꿰뚫었다(貫天人之敎)'고 썼다.


세월이 흘러 그때 그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사람을 위해 사람이 심은 나무만 남았다. 야릇한 질병의 횡행으로 시련을 겪는 아픔의 시절. 한 사람의 아픔은 자기의 아픔이라며 이 땅의 모든 백성이 더 오래도록 평안하게 살기만 기원하면서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은 큰 선비가 그립고 또 그립다.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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