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시론] 추분(秋分) 지나고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시론] 추분(秋分) 지나고
AD
원본보기 아이콘


어느 해 가을, 어떤 공공 캠페인 숙제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제목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처럼'. 물음 몇 개가 내용의 전부였습니다. 명절을 보내고 제자리로 돌아와서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나열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수수께끼 수준입니다.


"고향 가는 길. 그 끝없는 차량 행렬 속에선 아홉 시간, 열 시간도 말없이 참아내는 사람들이, 평소엔 왜 일 분, 일 초를 참지 못할까요. 고향에선 그렇게 정겹던 사람들이, 고향길만 벗어나면 어째서 그렇게 퉁명스러워질까요. 고향엘 가면 앞 동네 뒷마을을 제 집 안처럼 둘러보는 사람들이, 돌아오면 왜 옆집도 쳐다보지 않는 걸까요."

질문은 이어집니다. "고향에선 아무리 먼 친척도 촌수를 따지고 항렬을 따져가며 아래위를 가리는 사람들이, 도시에만 들어서면 왜 아래위가 없어지는 걸까요. 명절에 고향에서 가져온 그 착한 기운, 고운 마음을 왜 그렇게 순식간에 없애버리는 걸까요. 보름달을 닮은 그 사랑의 얼굴을 좀 더 오래 간직할 순 없을까요."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고향에 가면 말 잘 듣는 초등학생인데, 돌아오면 가출 청소년입니다. 하행선에선 아이처럼 선하게 반짝이던 눈망울이, 상행선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눈치와 요령으로 바빠집니다. 선비처럼 점잖던 사람들이, 갑옷 입은 병사들처럼 사나워집니다. 달덩이 같던 얼굴은 사라지고, 뾰족한 얼굴들로 돌아옵니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요. 무심코 펼친 시집에서, 그렇게 부끄러운 마음의 풍경을 봅니다. "을지로 육가만 벗어나면/ 내 고향 시골 냄새가 난다"로 시작해서, 이렇게 끝나는 시편입니다. "육가에만 들어서면/ 나는 더욱 비겁해지고"(신경림ㆍ'시외버스 정거장'). 시외버스 정거장 이쪽과 저쪽이 다른 사람을 만듭니다.

역이나 터미널은 감추고 숨길 것 없는 저쪽과 끊임없이 꾸미고 분칠해야 하는 이쪽의 경계입니다. 우리가 배우라면, 분장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거기서 연예인처럼 메이크업을 하고, 화장을 지웁니다. 고향 사람들은 내 민낯을 알고, 무대 근처 사람들은 나의 얼굴이 몇 가지쯤으로 바뀌는지 압니다.


당연히 대사도 바뀝니다. 비슷한 상황인데 말씨는 영판 달라집니다. 단어가 바뀌고 억양이 변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관객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보이는 장면에서 상대방의 전부를 읽어냅니다. 원래 그런 캐릭터려니 하고, 관심을 거둡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물 스토리의 '기-승-전-결'을 따라다닐 여유가 없는 까닭입니다.


딱한 연기자가 많습니다. 맡겨진 배역에 어울리는 연기가 아니라, 남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알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조차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즉흥극이나 부조리극을 보는 느낌입니다. 잔혹극이나 '관객모독(觀客冒瀆)'의 객석에 앉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시청률이나 흥행 코드에만 관심을 둔 질 낮은 제작자들처럼 자극과 충격의 수위만 높입니다. 그들의 고향 사람들이 보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선 반듯하고 예의 바른 사람인데." 마을회관 TV 화면 앞에서 노인들이 안타깝게 혀를 찰 것입니다. "쟤가 어려선 얼마나 착했는지 몰라."


교과서에도 실렸던 수필(김광섭ㆍ'일관성에 대하여')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나의 조부모께서는 나를 백 날 동안 사람에게도 해에도 달에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들의 방 안에서 무릎에다 놓고 키우셨다 한다. 나는 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나쁜 일이나 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생각한다."


어제는 '추분'이었습니다. 밤과 낮이 순리를 따라서 역할을 조정하는 날입니다. 해와 달이, 시간의 대합실에서 꼭 알맞은 분장을 하고 나왔겠지요.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포토] 12년만에 서울 버스파업 "웰컴 백 준호!"…손흥민, 태국전서 외친 말…역시 인성갑 "계속 울면서 고맙다더라"…박문성, '中 석방' 손준호와 통화 공개

    #국내이슈

  • 디즈니-플로리다 ‘게이언급금지법’ 소송 일단락 '아일 비 미싱 유' 부른 미국 래퍼, 초대형 성범죄 스캔들 '발칵' 美 볼티모어 교량과 '쾅'…해운사 머스크 배상책임은?

    #해외이슈

  • [이미지 다이어리] 누구나 길을 잃을 때가 있다 푸바오, 일주일 후 中 간다…에버랜드, 배웅시간 만들어 송파구 송파(석촌)호수 벚꽃축제 27일 개막

    #포토PICK

  • 기아, 생성형AI 탑재 준중형 세단 K4 세계 첫 공개 벤츠 G바겐 전기차 올해 나온다 제네시스, 네오룬 콘셉트 공개…초대형 SUV 시장 공략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코코아 t당 1만 달러 넘자 '초코플레이션' 비상 [뉴스속 기업]트럼프가 만든 SNS ‘트루스 소셜’ [뉴스속 용어]건강 우려설 교황, '성지주일' 강론 생략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