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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미국 총기 규제와 인종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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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뉴욕=김봉수 특파원] 새 학기를 맞아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 그러나 갑작스러운 총소리가 들려온다. 체육관에 숨은 한 학생은 재킷을 벗어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또 다른 학생은 스케이트보드로 유리창을 깨 탈출한다. 급하게 가위와 펜을 쥔 채 문 뒤에 숨은 남녀 학생들은 총기 난사범과 맞닥뜨릴 공포에 떨고 있다. 화장실에 숨은 한 여학생은 휴대폰으로 엄마에게 '사랑한다'라는 문자를 보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때 화장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학생이 숨은 곳을 향해 누군가가 걸어온다.


최근 미국에서 공개돼 큰 반향을 일으킨 한 공익 광고의 내용이다. 미국 총기 규제 관련 비영리단체 '샌디훅프로미스' 재단에서 제작한 '학교로 돌아오다'라는 제목의 이 광고는 최근 잇단 총기 사고로 공포에 질려 있는 미국 내 학교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실제 현지 학교를 가봐도 긴장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등하교길엔 늘 무장한 경찰관들이 순찰하고, 아이들과 동행한 학부모조차 출입은 학교 현관 앞까지만 허용된다. 학교 내에 들어가려면 학교 전담 경찰로부터 신분증 검사와 함께 표식을 받아야 가능하다. 창문이란 창문은 다 쇠창살로 막혀 있고, 운동장도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부모들의 걱정은 태산이다. 이 때문에 요즘 미국의 학부모들 사이에선 '방탄 가방'이 인기 아이템이 됐다. 최소 150달러 이상, 비싼 것은 500달러가 넘는 진짜 방탄 가방이다. 그래 봤자 권총 탄환밖에 못 막고, 총기 난사범들이 주로 사용하는 AR-15 같은 소총류의 탄환에는 소용도 없다. 부모들은 '혹시 모를' 사고 위험에 아이들을 그냥 방치하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에 비싼 가격에도 선뜻 지갑을 열고 있다.


미국에서 10년 넘게 고생하며 자식을 키운 한 교포는 최근 한국행을 결심했다. 툭하면 벌어지는 총기 사고에 대한 공포와 청소년들의 심각한 약물 오남용 때문에 떠난다는 것이다. 총기와 약물의 위협보다는 차라리 한국의 미세먼지가 낫다는 한탄도 덧붙였다.

미국에서 총기 사고의 심각성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연간 평균 3만여명이 총기 사고로 사망한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 70% 이상은 총기 소유 규제 강화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총기 소유자의 신분 확인 절차를 강화하고 부적절할 경우 소유를 금지하는 제한적인 내용의 규제 법안조차 공화당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상원에서 잠들어 있다. 표면적으론 연간 1억달러를 넘게 쓴다는 전미총기협회(NRA)의 강력한 로비, 빠르게 분노했다 급격히 냉각되는 유권자들의 성향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총기 소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 수정헌법 2조도 강력한 배경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적 사회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컨대 1960년대 '블랙팬서' 등 흑인 과격 단체가 총기 소유의 자유를 주장할 땐 NRA와 백인들이 주로 총기 규제 강화를 촉구해 관련 입법이 이뤄졌다. 그러나 최근엔 주로 농촌 지역 거주 백인들이 중심이 돼 흑인 범죄와 마약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이유로 총기 규제를 반대하고 있다. 즉 인종적 요인이 총기 규제에 대한 찬반 입장을 가르는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총기 규제에 소극적인 것도 이해가 된다. 기성 정치인들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태도와 달리 백인들의 욕망과 속내를 솔직하게 대변해 대통령이 된 그가 내년 11월 재선 도전을 앞두고 지지층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의 학부모들은 오늘도 아이들의 안전을 기도와 행운, 자위(自衛)에 의존하고 있다. 답답한 현실이지만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뉴욕=김봉수 특파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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