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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희의 갤러리 산책] 절규하는 태권브이, 왠지 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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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평화 시대 직업 잃은 태권브이…침대 누워 도발적 포즈 여인
갤러리 조은 24일까지 40대 작가 5명 단체전 '불혹, 미혹하다'

성태진 '절교III', '산다는 건'(왼쪽부터)  [사진= 갤러리 조은 제공]

성태진 '절교III', '산다는 건'(왼쪽부터) [사진= 갤러리 조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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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분명 로봇 태권브이인데 당당함의 상징인 '브이(V)' 자도, 강인한 팔과 다리도 보이지 않는다. 파란색 운동복(추리닝) 속에 자취를 감췄다. '추리닝' 끝에는 맨발이 삐져나왔다. 태권브이가 이렇게 추레할 수 있다니….


여자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매끈한 다리는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치마가 아찔하게 말려 올라갔다. 엉덩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도발적이고 야릇하다. 또 다른 그림 속 여자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슬쩍, 원피스 끈을 어깨 아래로 잡아당긴다. 금방이라도 '솨라락', 굴곡을 따라 흘러내릴 듯하다.

보이지 않는 여자의 얼굴은 조소하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을까. 관객은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뜨끔할 것이다.


갤러리 조은은 오는 24일까지 단체전 '불혹, 미혹하다' 전시를 한다. 공자는 마흔이 되니 미혹되지 않는다 해서 '불혹(不惑)'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40대는 안다. 마흔이 돼도 여전히 미혹되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오히려 40대가 30대보다 더 쉽게 흔들리고 불안할 수 있다는 것을.


'불혹, 미혹하다'는 김병주(40), 문형태(43), 성태진(45), 우국원(43), 이호련(41)의 작품을 전시한다. 전시하는 작품 수는 스물다섯 점에서 서른 점 사이다. 작품이 팔려나가면 다른 작품을 전시하고, 안 팔려도 한두 작품은 바꿔 단다. 동양의 성인(聖人) 공자에 대한 도발을 요구하는 전시회 제목만큼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태권브이는 현재의 40대가 태어나 처음 만난 영웅이었다. 로봇 태권브이는 1976년 태어났다. 현재 40대들과 같이 늙고 있다. 성태진은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한 2004년부터 태권브이 시리즈를 그리고 있다. 그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다니다 군에 입대했고, 제대한 뒤인 2000년 추계예술대 판화과에 다시 입학했다. 성태진이 미술로 길을 정했을 무렵 친구들은 하나둘 대학을 졸업했다. 외환 위기 직후였다.


"미술을 잠깐 해볼까 했는데 재미를 느껴 지금까지 왔다. 친구들과 만나면 어렵고 힘든 이야기를 나눴다. 아디다스 추리닝을 좋아했는데 친구 한 명이 생일선물로 비싼 A사 제품 대신 D사에서 만든 추리닝을 사줬다. 그 추리닝을 자주 입고 다녔고, 친구들 얘기를 듣다 추리닝 입은 태권브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호련 'Overlapping image 180722S', 'Overlapping image 170525S'(왼쪽부터)  [사진= 갤러리 조은 제공]

이호련 'Overlapping image 180722S', 'Overlapping image 170525S'(왼쪽부터) [사진= 갤러리 조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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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추리닝은 '백수'를 상징한다. 그의 그림 속 태권브이도 백수다. 화가에게 태권브이는 직업을 잃어버리는 캐릭터여야 했다. 완벽한 우주의 평화가 찾아온 시대가 배경이니까. 태권브이는 지켜야 할 대상이 없어져 직업을 잃는다. 시민들 사이에 끼어 일을 해야 하는데 모든 일에 서툴다. 백수가 되기 직전까지 악의 무리와 싸움만 했으니 할 줄 아는 일도 싸움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리어카 끌기를 배우고, 짜장면 배달도 한다. 여자를 만나본 적은 없다. 내 그림 속의 태권브이는 성인이 돼서야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점점 사회에 적응해간다."


이호련은 얼굴이 없는 여성의 은밀한 모습을 그림에 담는다. 호기심과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는 "남성 작가이기 때문에 여성을 그린다. 무의식적인 행위"라고 했다. 그림은 사진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게다가 여러 동작을 겹쳐 표현하거나, 특정 부위를 흐리게 처리해 상상력을 자극한다. 미술평론가 고충환(58)은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려 이호련의 그림을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개별 주체는 필연적으로 제도와 반목할 수밖에 없다. 개별 주체는 욕망을 실현하려 하고, 제도는 그 욕망을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명에 의해 그리고 제도에 의해 억압된 욕망이 개별 주체 속에서 무의식의 지층으로 내재화된다. 욕망은 이처럼 그 실현이 좌절된 탓에 정상적인 언어의 형식을 빌려서는 표상되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언어, 암시적인 언어, 무의식의 언어, 몸의 언어, 상징과 기호의 형태로 표상된다."


이들이 경험한 불혹은 어땠을까. 성태진은 "아버지의 불혹은 굉장히 나이가 많고 연륜적으로 성숙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불혹은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고, 가야 할 길은 먼데 나이만 계속 들어간다는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그래서 그에게 불혹은 불안한 나이다. 화백은 "그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할 텐데, 그 후에는 뭘 해야 할지 고민"이다. 일단 열심히 그림을 많이 그려놓을 작정이다.


이호련은 "마흔 살이 되면서 삶을 돌아보게 된다. 최근에 박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논문을 쓰면서 책도 많이 읽는데, 책 읽기도 그림을 그리는 일만큼 좋다"면서 "그동안 좋은 것들을 놓치고 살지 않았나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서른 살에 처음 전시를 한 그는 밤을 새워가면서 쉼 없이 일했다. 물론 지금도 공휴일, 주말 가리지 않고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림은 그의 직업이니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화가는 '다음 전시가 닥치면 좀 여유를 갖고 싶다'라고 생각하지만 매사 마음 같지 않다. 닥치면 또 전력투구할 것이고, '왜 이렇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과는 다른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고 느끼며 가볍게 삶을 돌아볼 수는 있다. 이호련은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으니 즐겁다"고 했다.


성태진의 태권브이 시리즈도 계속된다. 나이가 들어 배가 불룩한 태권브이도 그릴 생각이다. 그는 "배도 나오고 무기력하게 살지만 지구를 지키던 때와는 또 다른 꿈을 향해 달려가는 내용이기 때문에 결국 태권브이의 삶은 행복하게 마무리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우국원 'Donquixote', 문형태 'Glass shoes', 김병주 'Ambiguous wall-Facade #0502'(왼쪽부터)  [사진= 갤러리 조은 제공]

우국원 'Donquixote', 문형태 'Glass shoes', 김병주 'Ambiguous wall-Facade #0502'(왼쪽부터) [사진= 갤러리 조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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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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