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요일에 읽는 지리사]대학살의 상흔을 안고있는 양쯔강의 고도, 난징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지난 13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졌던 가장 참혹한 전쟁범죄 중 하나인 난징대학살 80주년 추모식이 열린 날이었다. 현대의 난징(南京)은 이 역사적 상흔을 안은 도시로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으로 주로 기억된다. 이날 추모식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중국 지도부가 대거 참석해 역사적인 고통을 다시금 상기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난징이 이렇게 역사적인 상흔만 가진 도시는 결코 아니다. 난징은 한자 그대로 중국 양쯔강 이남인 '남쪽의 서울'로서 오랜 옛날부터 중국 강남지방의 중심도시 역할을 해온 상업과 문화의 중심도시였다. 양쯔강 남안에서 약 300km 떨어진 이 도시는 주위가 구릉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요충지였으며 이 일대가 모두 기후가 온순하고 농업생산량이 풍부했다. 그래서 원래는 '금릉(金陵)'이라 불렸다.
이후 기원전 3세기경,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순행을 왔다가 이름을 바꿔버린다. 풍수에 조예가 있었던 진시황은 금릉에서 제왕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소나무를 빽빽이 심어 왕기를 누르고 이름 또한 불길한 이름인 '말릉(末陵)'으로 바꿔버린 것. 이에따라 진나라가 망한 뒤, 한나라 시절을 거치며 약 4세기동안 말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말릉이 주요 왕조의 수도가 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지(三國志)의 한 축을 세운 오나라 손권이 이곳을 도읍으로 삼아 오나라 황제위에 오른 뒤부터였다. 손권은 말릉이란 이름이 영 좋지 않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건업(建業)으로 바꿨다. 이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던 서진(西晉) 왕조때 이르러 마지막 황제 이름인 사마업의 이름과 업자가 겹친다 해서 건강(建康)으로 바뀐 뒤 한동안 건강으로 불렸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남조의 송, 제, 양, 진이 잇따라 수도로 삼으면서 오나라 이후 340여년간 여섯개 나라의 수도가 됐다하여 '육조의 도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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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에서 영국 군함에 파괴되는 청나라 함선 모습. 전후 청나라는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처음으로 시장이 전면 개방된다. 중국 근대사 굴욕의 시작이라는 난징조약의 배경도 강남지역의 중심지였던 난징이었다.(사진=위키피디아)
원본보기 아이콘이후 14세기 원나라시대까지 건강으로 불리다가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드디어 통일왕조의 수도가 된다. 명나라는 건강의 이름을 난징으로 바꾸고, 원나라 수도였던 대도(大都)의 이름을 베이징(北京)으로 바꾼다. 이때부터 베이징과 난징, 두 도시의 현대 이름이 붙여진 것. 이후 명나라가 3대 영락제 때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정치적 수도 자리는 내줬지만, 중국 전체의 경제적 수도 자리는 계속 유지한다. 중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부유한 지역으로 세금의 7할이 이곳에서 나온다 할 정도로 경제적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왕조가 다시 바뀌어 청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근대사의 굴욕의 시작이라 하는 난징조약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842년, 청나라와 영국간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이란 거대 시장은 역사상 처음으로 개방됐고, 근대사가 시작된다. 개항 이후의 사회적 혼란 속에 청나라에 저항하던 태평천국이 수도로 삼았던 곳도 난징이었다. 청나라가 망한 뒤에는 국민당이 이끌던 중화민국의 수도였고, 1937년 중일전쟁을 겪으면서 난징대학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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