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호의 라이브리뷰]마린스키 오페라극장 내한 프리뷰
러시아 공연 예술의 역사를 상징하는 마린스키 극장이 11월과 12월, 발레와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연거푸 내한한다. 먼저 이달 9일부터 12일까지 마린스키 극장의 블라디보스토크 분관인 4극장(연해주 프리모르스키 스테이지) 소속 단원을 주축으로 한 발레 '백조의 호수'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라간다. 다음달 12일에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수장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내한해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한다.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예술 총감독인 게르기예프는 독일 뮌헨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 역할 뿐 아니라 여름 시즌에는 러시아 연방의 구석구석을 자신의 전용기로 찾아다니느라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로 불린다. 한창 때는 뉴욕-로테르담-상트 페테르부르크 공연을 하루에 소화하기도 했다. 매니저와 예술가들이 게르기예프와의 짧은 미팅을 위해 기다리는 광경이 마치 총수의 결재를 기다리는 대기업 간부의 모습과 닮았다.
1988년 서른 다섯의 나이에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 키로프 극장(현 마린스키 극장) 감독에 오른 이래 게르기예프는 소련 붕괴와 거듭된 러시아 경제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린스키 극장을 2010년대 가장 번성한 오페라 하우스로 만들었다. 게르기예프를 향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2012년 러시아 정부는 APEC 정상회의를 기념해 블라디보스토크에 프리모르스키 스테이지를 지었고, 마린스키 분관(4극장)으로 지정해 상트 페테르부르크 본관과 함께 이원 체제를 운용 중이다.
게르기예프는 사석에서 여전히 마린스키의 본거지를 '레닌그라드'로 칭한다. 자신이 보고 자란 소련의 틀에서 과거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내재적 가치를 길어 올리는 방식이다. 여타 소련 시절 지휘자들이 개혁ㆍ개방 이후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게르기예프는 1992년 정치 신인 시절의 푸틴을 만나 그가 총리에 오른 1999년 이후 세계 예술사에 보기 힘든 수준의 권력가-예술가의 공고한 연대를 보인다. 그 결과물이 2010년대 마린스키의 비약적 성장이다.
12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내한의 피아노 협연자는 그의 오른팔과 다름없는 데니스 마추예프다. 게르기예프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입상했던 한국 클래식 연주자를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협연에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지난해 성남, 올해 여름 대관령ㆍ통영으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내한지가 다변화되는 것도 과거와 다른 양상이다. 단순히 로컬 프로모터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단계를 넘어, 연해주와 베이징 국가 대극원ㆍ삿포로 태평양 음악축제, 한국의 지역 페스티벌과 공연장을 본인을 브랜드로 연계하고 있다.
이번 발레단 프리모르스키 스테이지의 방한은 2020년대를 바라보는 마린스키를 전망하는 기회이자 러시아 정부와 게르기예프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극동 진출의 방향성을 조망할 시험대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마린스키 분관 이외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분관,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분원도 오픈한다. 한중일 국민이 비행시간 2시간 이내에 러시아 문화의 정수를 직접 체험하고 극동에서 러시아의 존재감을 인식하라는 권유가 더 정교해질 것이다. 1986년 고르바초프의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이 30년을 지나 군사 이외 영역에서 마린스키를 첨병으로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러시아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러시아 발레를 봐야한다". 게르기예프가 지난해 마린스키 발레 일본 공연 100주년을 기념해 남긴 멘트다. 일본은 1차 대전 중에 동맹국 러시아와 상호 지원 협약을 체결하면서 마린스키 발레단의 댄서를 도쿄로 초청했다. 과거 마린스키 발레의 내한은 러시아-일본의 특수한 쌍방 관계로 설계된 아시아 투어에 한국이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마린스키 발레는 오랫동안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와 함께는 '러시아 발레의 양대 산맥'으로 분류됐다. 세계적으로는 파리 오페라 발레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랜 역사의 발레단이다. 수석 무용수부터 솔리스트, 군무에 이르는 계급 체계가 엄격하고 각 등위를 채우는 무용수는 거의 모두 현지에서 나고 자란 순혈 러시안이다. 이방인은 마린스키 발레 입단도 어렵고 '발레단의 꽃'인 '프린시펄'에 오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그 사이 통념이었다.
1992년생 발레리노 김기민은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마치고 스타의 등용문인 로잔 콩쿠르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마린스키에 들어갔고 2015년 드디어 수석 무용수에 올랐다. 발레리노에겐 오직 대여섯 명에게만 허락된 자리다. 정서 뿐 아니라 피지컬이 세계 수준에서 특출해야 가능한 위치다. 올림픽 육상 남자 100미터에 동양인이 메달권에 드는 사건에 버금간다.
러시아 현지에서 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투어를 나가는 런던 코벤트가든에서 김기민의 주역 출연이 끝나면 현지 정론지들이 그의 젠틀함과 테크닉을 찬사했다. '백조의 호수'는 2012년 마린스키 내한 때도 발레단에 갓 입단한 김기민이 서울 무대에 오른 작품이다. 발레에 대해 연구할 줄 아는 동료 사이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김기민의 즉물적 성향이 극대화될 것이다.
김기민과 10ㆍ12일 공연을 함께할 파트너 빅토리아 테레시키나는 2001년 마린스키 발레단 입단 이래 초고속 승급을 거듭한 무용수이다. 그녀의 최고 미덕은 초절정의 라인에 있다. 바가노바 메소드의 정수를 그대로 이어받은 테크닉의 힘을 신체와 작품 곳곳에서 분사한다. 아우라와 화려함을 발산하는 패시지에서 깜짝 놀랄만한 탄력이 튀어나온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경이적인 높이의 아라베스크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 과거 리듬체조 경력이 오버랩된다. 발레단 내에서는 사악함으로 대변되는 흑조를 가장 처절히 표현했던 니오드라제의 전통을 계승한다. 우아함 안에 숨어있는 날카로움이 포인트다. 9ㆍ11일엔 프리모르스키 소속, 이리나 사포즈니코바-세르게이 우마넥이 주역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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