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공중전화
 코트를 입은 외국인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동남아시아 어디쯤
 짧은 한숨 끝에 동전을 꺼낸다
 사내는 좌우를 살피더니 급하게 걷는다
 툭 종이 가방이 떨어진다
 걸음을 무르고 재빨리 줍는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단거리 주자처럼

[오후 한 詩]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서광일
AD
원본보기 아이콘
 몸이 심하게 앞으로 쏠린다
 힐끔 뒤를 본다 걸음이 빨라진다
 계단을 두 칸씩 밟고 오를 때
 무심코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지하철 4번 출구를 나가는 중이었다
 사내는 뭔가에 쫓기는 듯
 계단이 끝나자마자 뛰기 시작한다
 붙잡고 싶었고 물어보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당신을 쫓고 있는 기분
 노동자로 보이는 외국인 한 무리가 내려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자음과 모음들이 부딪친다
 이미 늦었다


 
■상황은 이런 듯하다. 동남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지하철역 안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고 난 뒤 "좌우를 살피더니 급하게 걷는다". 그러다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재빠르게 줍는다. 그리고 "힐끔 뒤를" 돌아본다. 그때 "계단을 두 칸 씩 밟고 오"르던 '나'와 "무심코" 눈이 마주친다. 물론 "무심코"는 '나'의 생각일 뿐이다. "사내는 뭔가에 쫓기는 듯"도 그렇고. '사내'는 아마도 '나'를 자신을 쫓으러 온 자로 여겼던 모양이다. 심지어 '나'도 자신도 "모르게 당신을 쫓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이 장면 속에는 불법 체류 외국인이 처한 상황과 그를 포함한 이주 노동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이 간명하게 요약되어 있다. 마지막 문장 "이미 늦었다"는 단지 '나'의 탄식이 아니라 자칭 '한국(인)'이라는 국가-민족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오염된 이 구제 불능의 세계를 위한 뒤늦었으나 그래서 반드시 스스로 바로잡아야 할 기도인 셈이다. 채상우 시인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