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화
코트를 입은 외국인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동남아시아 어디쯤
짧은 한숨 끝에 동전을 꺼낸다
사내는 좌우를 살피더니 급하게 걷는다
툭 종이 가방이 떨어진다
걸음을 무르고 재빨리 줍는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단거리 주자처럼
몸이 심하게 앞으로 쏠린다
힐끔 뒤를 본다 걸음이 빨라진다
계단을 두 칸씩 밟고 오를 때
무심코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지하철 4번 출구를 나가는 중이었다
사내는 뭔가에 쫓기는 듯
계단이 끝나자마자 뛰기 시작한다
붙잡고 싶었고 물어보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당신을 쫓고 있는 기분
노동자로 보이는 외국인 한 무리가 내려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자음과 모음들이 부딪친다
이미 늦었다
■상황은 이런 듯하다. 동남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지하철역 안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고 난 뒤 "좌우를 살피더니 급하게 걷는다". 그러다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재빠르게 줍는다. 그리고 "힐끔 뒤를" 돌아본다. 그때 "계단을 두 칸 씩 밟고 오"르던 '나'와 "무심코" 눈이 마주친다. 물론 "무심코"는 '나'의 생각일 뿐이다. "사내는 뭔가에 쫓기는 듯"도 그렇고. '사내'는 아마도 '나'를 자신을 쫓으러 온 자로 여겼던 모양이다. 심지어 '나'도 자신도 "모르게 당신을 쫓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이 장면 속에는 불법 체류 외국인이 처한 상황과 그를 포함한 이주 노동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이 간명하게 요약되어 있다. 마지막 문장 "이미 늦었다"는 단지 '나'의 탄식이 아니라 자칭 '한국(인)'이라는 국가-민족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오염된 이 구제 불능의 세계를 위한 뒤늦었으나 그래서 반드시 스스로 바로잡아야 할 기도인 셈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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