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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진실을 파헤치는 자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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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밴더빌트 감독의 '트루스'

영화 '트루스' 스틸 컷

영화 '트루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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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부시 군복무 비리의혹 '래더 게이트'
사건보단 보도과정 속 인물에 초점
언론 환경에 대한 날 선 자세 돋보여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영화 '트루스'의 뼈대는 전직 프로듀서 메리 메이프스의 회고록 '진실과 의무: 언론, 대통령, 그리고 권력의 특권'이다. CBS의 시사프로그램 '60분'은 2004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군복무 비리 의혹을 제기한다. 베트남 전쟁을 피해 텍사스 주방위군 공군 조종사로 입대한 배경과 병역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등을 추적한다. 보수진영의 블로거는 퇴역군인 빌 버켓이 내놓은 메모가 타자기가 아닌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로 작성됐다며 날조를 주장한다. 제작진은 원본을 확보하지 못해 해명에 어려움을 겪는다. 경영진이 버켓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사과방송까지 해 진상조사를 받기에 이른다. 메이프스는 해고된다. 부사장 베치 웨스트와 프로듀서 존 하워드·매리 머피는 사직을 권고 받고, 보도를 담당한 간판 앵커 댄 래더도 대통령에 재선된 부시의 취임식 전에 퇴직한다.
영화 '트루스' 스틸 컷

영화 '트루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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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래더 게이트'는 지난 10년간 가장 중요한 저널리즘 사건으로 회자된다. 제임스 밴더빌트 감독(41)은 사건의 진위보다 메이프스(케이트 블란쳇)의 취재 과정과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겪는 고초에 주목한다. 구성은 지난 2월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토마스 맥카시 감독(50)의 '스포트라이트'를 닮았다. 2002년 가톨릭 사제 약 일흔 명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보도한 미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을 조명한 작품이다.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다. 로비 로빈슨 팀장(마이클 키튼), 마이크 레벤데즈(마크 러팔로) 등의 취재 과정을 비교적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전한다. 카메라를 움직이지만 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음악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 신파적 요소의 개입을 배제한다. 트루스는 메이프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다보니 스포트라이트보다 주관적이다. 프리랜서 프로듀서 마이크 스미스(토퍼 그레이스), 군사 자문위원 로저 찰스(데니스 퀘이드) 등 동료들의 활약도 미미하다.

영화 '스포트라이트' 스틸 컷

영화 '스포트라이트'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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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꽤나 사실적이다. 밴더빌트 감독은 메이프스를 마냥 옹호하지 않는다. 그녀는 동료들과 오리고기를 먹으며 이라크 포로들의 나신 영상을 편집할 만큼 매사에 거리낌이 없다. 인터뷰를 할 때는 온갖 달콤한 말로 진술을 확보하고, 일이 틀어지면 나 몰라라 한다. 제보자가 실수를 고백하는 영상을 촬영하고 동료들과 감자과자를 나눠먹으며 떠들 만큼 무책임하다. 특종에 혈안이 된 나머지 프로그램 방영 날짜를 당겨 증거를 꼼꼼하게 챙기지 못하기도 한다. 가끔 들르는 집에서 아들에게 아침식사로 우유 없이 시리얼을 내줄 만큼 가정적인 면도 없다. 이런 빈틈은 래더 게이트를 보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여지를 남긴다. 기자를 영웅으로 그리는 스포트라이트와 대조된다. 맥카시 감독은 부정한 타협을 의심할 정황이 충분한 로빈슨 팀장을 깊게 파고들지 않고 정의로운 언론인으로 서둘러 매듭짓는다. 취재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도 빈약하게 설정했다. 그래서 막막한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흐름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영화 '트루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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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약점은 충무로에서도 자주 보인다.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2014년)'가 대표적이다.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의 실체를 파헤친 드라마로, 프로듀서 윤민철(박해일)이 심민호(유연석)의 제보 하나만 믿고 취재에 뛰어든다. 윤민철은 메이프스처럼 정의롭지 못하다. 유리한 답변을 얻으려고 거짓말을 한다. 궁지에 몰린 제보자를 겁박하기도 한다. 임 감독은 이렇게 어렵게 쌓은 갈등을 너무나 쉽고 간편하게 해결한다. 그래서 사실적인 느낌이 약하다. 트루스는 전직 프로듀서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에서도 언론 환경에 대한 날 선 자세가 돋보인다. CBS의 보도를 그대로 전하기 바쁜 방송들을 보며 메이프스와 동료들은 말한다. "보도한 걸 보도하고 있잖아. 우리 업계가 이렇게 됐다니까. 고생해서 새로운 사건을 취재할 필요가 뭐 있어. 남이 취재한 걸 같이 떠들면 그만이지." 적당한 방영날짜를 잡지 못할 때는 "이렇게 중요한 뉴스가 빌리 그레이엄(성직자)이나 닥터 필(심리학자)한테 밀린다고?"라며 불평한다. 우리 언론의 현실은 이보다도 참담하다. 보도 자료를 먼저 썼다는 이유로 제목 앞에 '단독'이라고 붙인다. 포털 사이트에서 돋보이는 것이 우선이다 보니 자극적인 제목과 베껴 쓰기가 난무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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