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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오스카 와일드

최종수정 2016.08.12 14:17 기사입력 2016.08.1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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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다녀온 후배 기자에게 물었다.
“어디에 다녀왔니?”
“부산이요.”
“해운대? 광안리? 하나도 안 탔네?”
“예, 호텔에서 책만 읽다 왔어요.”
“응, 그랬구나. 뭘 읽었는데?”
“한강이 쓴 소설이요.”

독서는 휴가를 보내는 좋은 방법이다. 나도 가끔 평소 별렀던 책을 가져다가 샅샅이 읽는다. 굳이 휴가까지 가서 읽을 필요가 있느냐고? 있다. 책 읽기는 연애를 닮았다. 첫눈에 반하는 순간이 있고, 친해질 시간도 필요하다. 공을 들일 때는 전력투구해야 한다. 사내들은 이 진리를 본능으로 안다. 그러기에 대학입시를 앞둔 여드름 총각이 밤새워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수학의 정석’이나 ‘해법수학’, ‘성문종합영어’를 멀찍이 미뤄둔 채 '꽃편지지'에 잉크로. 그렇게 책은 내 것이 되고 평생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아시아경제에 칼럼따위를 쓸 때 인용하거나 예로 드는 책 가운데 상당수는 십대 때 읽었다. 노래가 많이 나오는 연극(뮤지컬은 아니다) '보물섬'에 대해 쓸 때 초등학생 시절에 읽은 원작을 생각의 실마리로 삼았다. 창비에서 낸 조태일의 시집 '국토'에 대해 쓸 때는 중학생 때 읽은 춘원의 '무정'을 떠올렸다. 지금 당신이 읽는 그 책은 죽을 때 관에 넣어 가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이승을 하직할 때 그 책에 실린 한 구절만 계속해서 생각날지 모른다.

근사한 글귀를 인용하면 폼이 난다. 그래서 많은 글쟁이들이 아무개가 이렇게 말하였다 식으로 글을 시작한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의 반대인데, 근기가 허약한 사람의 글쓰기 방법으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이렇게 남의 글이나 고사성어, 명언을 가져다 쓸 때도 ‘선구안’이 있어야 한다. 요즘 같은 시절에 ‘악법도 법이라고 했다’라든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다’던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같은 인용문으로 글을 시작했다가는 아무도 읽지 않을 뿐 아니라 다음부터는 쓸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인용도 글줄이나 읽은 사람이 잘한다.

책을 읽는 여러 방법이 있다. 옛 선비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있다. 낭독. 말없이 한 자 한 자, 한 줄 한 줄 눈길로 따라가도 좋다. 묵독. 소리 없이 눈으로 읽어도 우리의 뇌는 음성행위를 한다. 두개골 앞에 훤히 불이 들어온 프롬프터처럼 책을 쓴 언어가 은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그래서 책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는 영겁에서 시작해 나를 스쳤다가 다시 영겁으로 가는 우주의 나그네가 된다. 책은 저자와 그 물리적 형태로부터 해방되어 추상이 되는 한편 명료한 체험으로 뇌리에 각인된다.
초서법은 책의 중요한 내용을 옮겨 적으며 읽어 내려가는 방법이고 정독법은 뜻을 자세히 살펴가며 읽어 내려가는 독서법이다. 또한 속독은 책의 내용을 문단이나 문장 단위로 빠르게 읽어 나가는 방법이다. 대개 내용을 흐름으로 쫓는다. 이외에 발췌독(拔萃讀)이 있다. 책의 중요한 부분만을 골라 필요한 부분만 읽는 독서법이다. 발췌독도 독서로 쳐줘야할지는 모르겠다. 발췌독을 하면 저자의 메시지를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나 책의 내용을 안다고 하기 어렵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저자의 뜻을 헤아리거나 행간을 거닐며 사색하는 과정을 거를 수밖에 없다.

발췌독에 맛을 들이면 제대로 된 독서 습관을 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나는 누구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발췌독을 하느니 차라리 적독(積讀)을 권하겠다. 책을 읽지 아니하고 쌓아 두기만 함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인데, 책상에 책을 가져다 놓고 그 책을 자주 보는(읽는 게 아니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책과 친해지고, '아는 책'이 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 날엔가 그 책의 내용이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정말 읽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숲속에 있는 돌탑에 갇힌 채 잠든 얼굴 모르는 공주가 아니라 늘 지나치던 그 애와 곧잘 사랑을 꽃피우듯이.

요즘도 헌책방이나 지하철 역에 딸린 작은 서점에는 '명언집'이나 '고사성어', '사자성어' 책이 많다. '오스카리아나'도 그런 책인가? 책소개를 보자. “천 개의 이야기, 천 가지 빛깔, 언어로 만든 황홀한 모자이크!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과 기록에서 가려 뽑은 주옥같은 문장들. 오스카리아나는 명언, 경구, 아포리즘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오스카 와일드의 수많은 말들을 가리킨다. 이 책은 우리에게 더없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오스카리아나’를 한데 모아 제자리를 찾아 주고자 하는, 때늦은 그러나 꼭 필요한 시도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중략) 어쩌면 매 순간 만나고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들을 ‘제대로’ 느끼고,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와일드가 언어의 마술사였음에는 틀림없다. 오스카리아나를 감싼 띠지 한 장만으로도 알 수 있다. 거기 이렇게 씌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그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 가슴 찡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마술사를 세 치 혀가 파멸의 길로 인도했으니 얄궂다. 그는 동성연애자였는데 퀸즈베리 후작으로부터 소년 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후작은 더글러스라는 자의 아버지였는데, 아들이 와일드와 너저분한 관계를 맺는 데 분노했다. 와일드의 상대는 더글러스 말고도 더 있었던 모양이다. 검사가 질문한다.

"더글러스의 남자 시종과 키스한 적이 있습니까?"
"아뇨. 그는 불행히도 추남이었지요."

와일드는 재판에서 이길 거라 확신하며 이 말을 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자기 발에 덫을 채웠다.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시종이 못생겼기 때문에 키스를 하지 않았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했으리라는 뜻으로 들었다. 와일드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중노동과 징역 2년형이 선고되었다. 복역을 마치고 나온 그는 작가로서나 생활인으로서 파멸했다. 2년 동안 유럽을 유랑하며 술이나 구걸한 그는 1900년에 죽었다. 사인은 뇌수막염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매독 같은 성병 후유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오스카 와일드 지음/박명숙 옮김/민음사/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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