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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X파일] '엽기 살인마' 앞에 있는데…경찰 "부부싸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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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위협받는 순간, 필사의 112 구조신고…'오원춘 사건' 안일한 대응이 부른 참극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법조 X파일'은 흥미로운 내용의 법원 판결이나 검찰 수사결과를 둘러싼 뒷얘기 등을 해설기사나 취재후기 형식으로 전하는 코너입니다.

"□□초등학교 좀 지나서 ○○놀이터 가는 길 쯤에 있는 집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

2012년 4월1일 오후 10시50분, 경기지방경찰청 생활안전과 112 통합센터에 급박한 목소리의 신고가 들어왔다. A(27·여)씨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상태였다. 멀쩡하게 길을 걷다가 괴한에게 납치당했다. 괴한은 골목길 자신의 집으로 A씨를 끌고 들어갔다.
A씨는 지옥 같은 상황을 벗어날 기회를 마련했다. 괴한이 화장실에 가려고 방심한 틈을 타서 방문을 걸어 잠근 뒤 112통합센터에 신고했다. 비교적 상세한 위치까지 전한 상태였다. 경찰이 곧바로 현장으로 출동한다면 A씨는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괴한은 방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창밖으로 가서 방안에 있던 A씨 머리를 움켜잡았다. 방문을 열기 위한 목적이었다. 결국 방문은 열렸고, 비명이 이어졌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 비명소리는 고스란히 휴대전화를 통해 112 통합센터로 전달됐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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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는 A씨의 목소리, 괴한의 목소리도 휴대전화를 타고 경찰 쪽에 전달됐다.
경찰 쪽 대화 내용은 충격이었다. "부부싸움이네" "끊어 버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A씨를 구원해줄 것으로 믿었던 그들은 급박한 현장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112 신고센터 지령실 근무자는 A씨 신고내용이 녹음된 녹취파일을 재생시키려 했으나, 시스템 오류로 재생이 되지 않았다. 4월2일 오전 1시가 돼서야 현장 주변에 출동한 경찰에게 파일이 전달됐다.

A씨가 괴한에게 끌려간 장면은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A씨가 괴한에게 끌려간 장면은 초등학교 앞에 설치된 방범용(스쿨존) CCTV에 다 찍혀 있었다.

A씨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경찰에 신고했다. 비교적 상세한 본인의 위치를 전했다. A씨가 끌려간 장면은 CCTV에 찍혀 있었다. 그렇다면 A씨를 구해낼 수 있지 않을까.

경찰이 수색을 하기는 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을 훑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조용히(?) '도보'와 순찰차를 통해 진행했다. A씨는 보이지 않았다.

수원중부경찰서 형사과장은 4월2일 오전 6시50분 형사전원을 소집해 놀이터 주변의 주택가를 가가호호 방문해 주민들에게 A씨 사진을 보여주면서 혹시 여자 비명소리를 듣지 않았냐고 탐문수색할 것을 지시했다.

4월2일 오전 11시, 드디어 괴한의 집 앞에 경찰이 도착했다. 50분간 열리지 않던 문이 마침내 열렸다. 11시50분, 그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괴한은 바로 '엽기 살인마' 오원춘이었다.

A씨가 다급하게 경찰에 신고한지 12시간 지난 상황에서 현장에 방문한 결과는 참혹했다. A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수백 조각으로 잘라졌다. 4월2일 새벽 오원춘은 A씨를 살해한 뒤 신체를 훼손했다.

오원춘의 집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게 아니었다. 주변에는 초등학교도 있고 바로 옆에 가게도 있었다.

A씨는 너무도 황당하게 생명을 잃고 말았다. 본인이 왜 끔찍한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엽기 살인마 앞에서 경찰에게 구조 요청을 했지만, 경찰은 참혹한 사건을 막지 못했다.

A씨의 억울한 죽음에 경찰은 책임이 없는 것일까. A씨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심까지는 A씨가 숨진 것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A씨 유족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일부 손해배상만 인정했을 뿐이다.

대법원은 판단이 달랐다.

"최초로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들이 피해자의 112 신고 내용과 그 심각성을 제대로 전달받았다면, 그 신고 내용에 따라 이 사건 범행 현장 부근으로 수색의 범위를 한정해 수색했을 것이고, 수색 당시까지 가게 문을 열고 있었던 목격자로부터 목격 진술을 청취해 피해자가 생존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 이전에 피해자를 생존 상태에서 구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법원은 A씨 죽음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해,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특히 112 신고센터 경찰관들의 부실한 초기대응, 오원춘의 엽기적인 살인 행태, 피해자 및 그 유가족이 입은 피해의 정도 등 구체적인 경위를 고려할 때 경찰관들의 직무위반행위가 없었더라면 피해자의 사망이라는 결과를 피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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