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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연필로 베껴 쓴 조태일 시집 '국토', 그리고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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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다 싶게 베어 던지는 살 한 점, 그것이 시의 제 모습이라고 믿었다

조태일 '국토'

조태일 '국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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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서가에 꽂힌 시집이 몇 권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읽은 첫 시집이 무엇인지, 어디에 꽂혀 있는지 정확하게 안다. 만해 스님이 쓴 '님의 침묵'. 삼중당에서 펴낸 문고본이다. 판권에 가격은 없다. 장정일은 그의 시 '삼중당문고'에 150원이라고 적었다.

나는 이 시집을 1976년 여름(책이나 일기에 기록이 없다)에 문구점에서 샀다. 문구점은 서울 면목초등학교 정문에서 큰길을 건너면 있었다. 책방을 겸했는데, 전과나 수련장 같은 참고서를 주로 팔았다. '님의 침묵'은 춘원의 '무정'과 함께 샀다. 나는 중학생이었고 때는 여름방학 기간이었다.
내 책상은 골목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있었다. 거기서 춘원의 소설과 만해의 시를 읽었다. 눈이 아프면 잠시 하늘을 보았다. 흰 구름이 흘러갔다. 나는 알고 있었다. 구름은 돌아오지 않으며 풍경은 오직 이 순간에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일회성에 대한 인식은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다. 책 읽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체험일 뿐이다. 그래서 책 소개나 해설을 성실하게 읽지 않는다. 독서 경험 역시 유일하며 일회적이다.

지금 '님의 침묵'은 시집들과 함께 꽂혀 있지 않다. 삼중당에서 나온 문고본들과 함께 있다. 귄터 그라스, 알베르 까뮈, 장 폴 사르트르, 프란츠 카프카, 이상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나란히 꽂혔다. 이 책들은 장정일이 썼듯이 깨알같이 작은 활자로 인쇄했고,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나도 장정일처럼 수업시간에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는 양피지거나 파피루스에 포박되어 문자로 남는 순간 일회성의 숙명을 벗어나 재현 가능한 신화가 된다. 현대의 시집들은 문자가 붙들어둔 노래이다. 현대의 시가 이미지의 변주로서 내면화한 뒤에도 시인들은 여전히 무사이(Musae)의 성령에 사로잡혀 노래한다.
내 집 서가에 시집은 세로로, 또 가로로 꽂혀 있다. 위아래 칸 사이에 비는 공간에도 어지럽게 꽂았다. 그 중에 다른 책과 어울리지 않는 시집이 한 권 있다. 이 시집은 세계에 오직 한 권뿐이다. 조태일의 '국토'. 창작과 비평사(창비)에서 낸 창비시선의 제 2번이다. 제 1번은 신경림의 '농무'이다.

연필로 베낀 '국토'

연필로 베낀 '국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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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서울 답십리에 있는 내 방에 앉아 갱지에 연필로 이 시집을 베꼈다. 그때는 이 시집을 구하기 어려웠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황명걸의 '한국의 아이'도 그랬다. 창비의 시집들은 '문지'에서 내는 시집들과 함께 문학청년들의 서가를 채워나갔다. 민음사에서도 좋은 시집을 냈지만 번역본과 선집(選集)이 많았다.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집을 사서 읽었다.

내게 시를 가르친 선배께서 1983년 겨울에 집에 오셨다. 나는 소설가가 되려고 대학교에 갔지만 그분을 만난 뒤 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선배는 내 서가를 살펴보았다. 내가 모은 시집은 100권 안팎이었다. 선배는 손으로 큰 네모를 그렸다. "이 정도 모으면 너도 시인이 되어 있을 거다." 500권은 모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시재(詩才)가 아니었다. 훨씬 많은 시집을 모은 다음에야 시단의 말석에 끼어 앉았다.

젊은 날의 예민한 신경줄은 사소한 자극에도 공명했다. 신경림이 쓴 '갈대'를 읽고 참기 어려운 비애와 엑스타시를 함께 느꼈다. 미친 듯이 창비의 시집을 사 모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수집하기를 그만뒀다. 지금은 대학생 때만큼 시집 모으기에 몰두하지 않는다. 여전히 시집을 사지만 영혼 없는 장서행위를 거듭할 뿐이다. 감수성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리라. 어지간해서는 시를 읽고 감동하지도 않는다.

1980년대 초반의 창비시선은 시인이 되고자 하는 청년의 의식을 지배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이 거기 있었다. 거칠다 싶게 베어 던지는 살 한 점, 그것이 시의 제 모습이라고 믿었다. "흐르는 것이 물 뿐이랴"하고 척 던져놓고 시작하는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그 힘차고도 비감한 정서.

내가 연필로 베낀 조태일의 시집, '국토' 시편은 '모기를 생각하며'로 시작된다. 그 둘째 연은 이렇다. "모기야 지난 여름/작은 음성으로 울어싸며/내 피를 맹렬히 빨아 먹던/네 입술만이 오직 내 것이다./내 능력이다. 사랑이다. 그리움이다."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 "이런 건 나도 얼마든지 쓰겠다", 둘째 "정권(正拳)에 굳은살이 잔뜩 박인 커다란 주먹 같네."

퇴계로에 있는 컴컴한 다방, 지금은 사라진 '신라'에서 청자 담배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창비에서 낸 시집을 읽었다. '농무'로 시작되는 시선을 차례로 읽어나갔다. 신문사나 잡지사에 신인상 응모작품을 보낸 뒤 쿵쿵 뛰는 가슴을 달래며, 언제 걸려올지 모를 전화나 전보를 기다리며. '언젠가 나도 창비에서 시집을 내야지'. 유일한 꿈은 아니었지만 일부이기는 했다.

창비시선 399,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창비시선 399,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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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는 여전히 시집을 찍어낸다. 아시아경제 문화부에는 거의 매주 창비의 새 시집이 배달된다. 신간안내 쓰기를 마친 책은 한곳에 쌓아 둔다. 시집은 예외다. 내가 (혼자) 느끼는 시인들과의 유대와 문청시절 추억의 소실점, 조태일의 시집으로 집약되는 젊은 날의 순정이 향수와 부채가 되어 나를 압박한다.

'언젠가' 조태일과 그의 시집과 창비시선에 대해 쓰리라고 다짐했다. 지금 그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겨울밤 연필로 베껴 내려간 조태일의 시집은 아련한 그리움 속에 철없던 시절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 풋내기 문청이 거칠게 훑고 지나간 수많은 시편과 페이지들이 하나하나 눈앞에 떠오른다.

시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시대. 때로는 미세먼지만큼이나 번잡한 무리여서 정리해고가 필요할 지경이다. 낸들 무사하랴. 매주 책상에 와 쌓이는 창비의 시집들이 묻는다. 너는 누구냐. 30여 년 전 퇴계로 골목에 있는 컴컴한 다방 구석에서 흘린 너의 눈물은 무엇이었느냐. 1980년대에서 날아온 청구서가 내 의식의 출구를 지키고 섰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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