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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못받는 나라... '번역테러 방지법'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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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윤작가의 '문화 훔쳐보기'

사진 = 영화 '롤리타'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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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저녁, 장충공원 인근의 한적한 카페에 손님이 한 명씩 모여든다. 이들은 모두 주 1회 퇴근 후 모임을 갖는 독서클럽 회원들로, 이번 주 선정도서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책의 첫인상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데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남자회원 A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읽을수록 진이 빠져서 남자가 싸이코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반박하는 여자회원 B는 “섬세한 문장력에 치밀한 심리묘사가 압권이었는데요, 전?” 라며 맞선다. 남자회원 C는 “전반적인 분위기나 표현도 좋았고 잘 읽혔습니다. 선정적이라기보단 섹시하고 매력적인 느낌도 들던데요?”라고 답하고, 여자회원 D는 “재혼한 부인의 딸과의 관계가 꽤나 건조하게 서술된 느낌이었어요. 금단의 관계를 인지하고도 감행하는, 소아성애자의 범죄기록 같기도 하고. 뚝뚝 끊어지는 서술이 거기에 한몫했죠.”라고 말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의견이 다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적은 처음이라 서로 난감하게 바라보는 사이, A가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A의 책을 바라보더니 다들 자신의 책을 꺼내놓는 회원들. A와 D는 민음사, B와 C는 문학동네 판본이다. 내친김에 이들은 같은 부분을 펼쳐놓고 어떻게 문장이 다른지 비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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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서로를 만지기 위해 세상의 행복한 말들을 모두 동원하면서 모래 속에 반쯤 감추어진 손이 내게로 슬슬 기어오고”

문학동네 “이따금 고맙게도 시간과 공간에 틈이 생길 때마다 서로를 만지곤 했다. 모래 속에 반쯤 파묻힌 그녀의 손이 나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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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한 때는 대스타가 되어 2020년쯤에나 은퇴하는 꿈을 꾸었던 나의 여자.”

문학동네 “벌써부터 뱃속의 아기는 장차 큰 인물이 되었다가 서기 2020년쯤 은퇴할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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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이리저리 비틀고, 내가 시도하려는 것보다 더 깊고 더 어두운 물 속으로 미끄러지면서, 나는 미끄러운 자아가 나를 피해 가는 것을 느낀다.”

문학동네 “군데군데 후미진 구석을 들여다보면 종종 나 자신도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교묘한 수작을 부리면서 굳이 살펴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깊고 어두운 물속으로 달아나는 내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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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찐 표정의 네 사람. 이건 판본이 다른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책이었다.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두 책을 살펴보면 주인공의 심리와 남녀관계가 전혀 다르게 이해되고 있었다. 더 이상의 논의가 불가능함을 간파한 회원들은 이날 책에 대한 토론은 접고,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번역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기는 것이다. 출발어와 도착어의 개념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나마도 어원이 같은 경우에 한해 두 언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작업 정도가 최상의 번역조건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사진 =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제공

사진 =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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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과 지식만으로 8개 국어 번역

‘롤리타’는 강남의 귤이 회수를 건너와 심으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언어의 차이가 원전의 서사와 감동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사례에 해당한다. 얼마 전 타계한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인데, 본래 작가이기에 앞서 기호학자인 그의 소설은 기호학과 미학, 중세철학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한 흥미로운 작품으로 유명하다. 문제는 작가의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겨오는가였는데, ‘장미의 이름’을 옮긴 번역가 이윤기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 자신이 갖고 있던 서양문화 전반에 대한 교양, 자신의 전공이었던 신학적 지식, 그리고 사전만을 갖고 7~8개 언어가 등장하는 이 책을 번역했다. 책을 낸 출판사에 따르면 이 책이 첫 출간 된 1986년 5월 당시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으며, 번역의 시기와 완성도 역시 번역문화가 발달한 일본보다 정교한 데다 4년이나 앞섰다고 하니 번역이 단순한 비교작업을 넘어 문예창작의 한 분야임을 입증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사진 = 알베르 카뮈

사진 =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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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표현 놓고 오역 논쟁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가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살인과 사형언도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그 부조리함 만큼이나 내용이 다소 난해하게 읽히는 경향이 있는데, 지난 2014년 한 번역가는 기존에 출간된 ‘이방인’의 내용이 잘못 번역돼 국내에 소개됐으며 내용이 어렵게 읽히는 것은 번역가의 오역 때문이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수학 문제의 답도 하나인 것처럼 번역 문제의 답도 사실은 하나”라며 기존 김화영 교수의 번역에서 58개의 오역을 발견, 자신의 새로운 번역을 비교 게재한 뒤 ‘이방인’을 출간했는데, 논쟁의 결과나 노이즈 마케팅에 대한 비판과는 무관하게 국내 독자들의 큰 관심을 받으며 ‘누가 맞는지 살펴보자’는 취지로 ‘이방인’ 판매량이 급증하는 호재를 누리기도 했다. 논쟁에 앞서 김화영 교수는 과거 한 인터뷰를 통해 “원문 자체가 어려운데 독자들이 아무 노력도 안 하면서 쉽게만 번역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진 = 2015 노벨문학상 수상자 '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문학동네 제공

사진 = 2015 노벨문학상 수상자 '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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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없이 노벨문학상 기대하는 심리

이처럼 외국문학의 국내번역시장은 그 규모나 수준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이에 반해 한국문학의 해외번역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투자가 없으니 소비도 없다. 영화와 음악, 드라마가 세계로 뻗어 나가 ‘한류’를 만든 사이 한국문학은 아직도 저수지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형국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은 한국문학작품을 출판하는 해외 출판사에 5,000달러의 출판지원금을 제공하고 있으나 그 액수나 규모는 실제 출판으로 이어지기까지 턱없는 수준이다. 국내 출판사가 외국 유명작가에게 지불하는 선인세의 규모가 10억을 돌파하는 사이 한국문학 내부의 처우는 그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현실에서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만 되면 수년째 오르내리는 한국작가의 수상을 기대하는 풍경은 한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한국어의 특성, 말의 맛

한 번역가는 외국의 학회에서 “한국에도 문학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충격받은 적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영화 ‘베테랑’의 대사처럼 “우리가 돈이 없지 문학이 없냐!”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정작 외국에 번역된 국내문학서적의 빈한한 목록을 보면 한숨이 앞선다. 전문가들은 출발어와 도착어 둘 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경우 언어의 특성이 장벽이 되는 경우도 있다. 출간을 앞둔 한 독일어 번역가는 “한국어는 교착어이고 독일어는 굴절어에 속하기 때문에 기능에 따라 대응하는 형태소가 다르면 그 의미도 다르게 읽힌다”며 “사투리 문장의 경우 ~하겠어 인지 ~할랑께 인지 그 의미와 어조의 음악성을 잡아내기 어렵다”고 털어놓는가 하면, 프랑스어 번역자인 최애영 교수는 과거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어는 의성어, 의태어가 거의 없는 언어다. ‘꺼이꺼이’ 같은 부사어는 대체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라고 고충을 토로한 바 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발표되기 무섭게 서점에서 책으로 만날 수 있을 만큼 외국문학에 대한 국내시장의 대응은 발 빠르다. 이런 흐름은 투기만 노린다는 비판만큼이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수준이 높은 우리 시장과 독자의 수준을 반영하는 가늠자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언어를 가진 나라라서 겪는 비애라고 하기엔 그 결과가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이제 우리문학을 세계시장에 내놓는 과정의 정교함이 요구되는 때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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