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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연꽃을 그리고 빚다' 전시회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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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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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가 충무로의 크고 작은 창들을 '톡, 톡!' 두들겨보며 지나간다. 문득, 따듯하다고 느낀다. 아니,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일이면 벌써 우수(雨水),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절기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린다"고 했다. 그래, 겨울은 갔다. 꽃샘추위가 있겠지만 두렵지 않다.

시인 송혁이 '해토(解土)'에서 노래했다. "누구의 손길에서도 짜릿한 기쁨이 쥐어진다/다시 누구의 눈에서도 아득한 애정이 스스로히 허락된다/진실한 하나의 믿음 속에/우리들을 있게 한 겨울은 다시 풀리고/모두의 가슴 속에는 충만한 미소의 여운이 번진다." 바로 그 시간을 우리는 지나고 있다.
절기가 가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 어제고 오늘이며 내일일 뿐인데, 가고 옴을 분별하는 덧없음을 왜 모르겠는가. 무릇 시간이란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 '세월'에서 쓴 1913년 런던의 눈 내리던 어느 날이며, 그날 크로스비의 모자에 내려 쌓인 눈이다. 시간의 뜻은 찰나와도 같은, 바로 '지금'이며 '이제'인 것을.

크로스비의 모자에 쌓인 눈은 엊그제 내 손 위에 내린 눈과 같다. 평창동 작은 사찰의 돌부처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다. 최인호가 연재소설 '가족'에 쓴, '작은 북채처럼 남한강의 수면을 두들기는 한낮의 비', 그 한 방울의 궤적과도 같다. 과연 그러하나 정녕 그래야만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나날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몬태나로 가자.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마지막 장면, 매클레인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그는 말한다.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거의 돕지 못한다. 무엇을 도와야 할지도 모르고 때로는 그들이 원하지도 않는 도움을 준다. 가족들 간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지독한 절망의 구렁텅이! 하지만 목사는 계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사랑한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다." 그래,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랑이 없다면 나는, 우리는 '소리 나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에 불과하지. 통주저음(basso continuo)처럼 블랙풋 강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어제(17일) 오후 서울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 전시회에 갔다. '연꽃을 그리고 빚다'. 도예 작품과 유화가 한결같이 연꽃을 추구하고 있었다. 도기들은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차분하게 흡수했다. 그림은 고졸한 붓놀림으로 연꽃의 내면을 헤아렸다. 허나, 도기와 연꽃 그림이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 싶었다.

함께 전시를 보러 간 나의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도기는 불에서 나왔으며 연꽃은 물 위에 꽃을 피운다. 이렇듯 다르되 흙이 낳았으니 끝내는 이렇게 감사한 인연으로 만나는 것이다. 저 흙 그릇의 테두리를 보라. 여린 입술과 같다. (그림 속) 연꽃을 향해 살갑게 말을 건네고 있지 않은가."

무릎을 쳤다. 전시회는 서양화가 박경숙과 도예작가 박명숙이 함께 열고 있었다. 다른 길을 걷는 자매의 정진이 연꽃으로 결실하였으나, 한 뿌리에서 뻗은 가지이니 사무치는 인연이 아니랴. 따뜻한 불빛 아래서 한 꺼풀 벗은 눈으로 새삼 보았다. 사랑 가득하여라. 전시장의 공기, 조곤조곤 주고받는 축하와 감사의 말씀.

전시장 한구석에서 소설가 정찬주를 발견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전라도 화순에 칩거하며 '피객패'를 걸어놓고 붓방아만 찧는 독한 사람이다. 그가 인사동까지 걸음을 한 사연을 짐작했다. 그는 박명숙의 남편이다. 암만 '쎈 사람'이 불러도 사립문 나서기를 꺼리는 소설가의 하루를 허물어 이곳으로 부른 힘이야 물어 무엇하리.

평생 "사랑한다" 말했을 리 없는 그는 아내가 만든 작품을 닮은 그 기척, 자신만의 언어로 고백하고 있었다. 그러니 박명숙의 작품은 정찬주라는, 고요하고도 뜨거운 가슴 속 도가니가 품어 형체를 빚고 매무새를 무쇠처럼 다졌으리라.





허진석 문화스포츠레저부장 huhba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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