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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문화 프리즘] 쌍문동에서 잘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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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는 쌍문동에 가지 않는다. 드라마 속 쌍문동은 철거되어 사라졌다. 의정부에 지었다는 세트는 헐릴 운명이다. 시에서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려고 했지만 드라마를 찍기 위해 투자한 기업과 의견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 남은 드라마는 '연속극'들이다. 1970년대의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면서 시청한 '아씨'나 '여로'가 드라마에 대한 내 기억을 지배한다. 기자가 된 뒤로 텔레비전은 뉴스 아니면 스포츠 중계를 보는 데 사용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기간은 나의 텔레비전 시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시기이다. 나는 매주 금요일 일찍 퇴근을 하면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이 전원을 켜고 상업방송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먹방'과 '드라마'를.

만재도에 간 차승원 씨의 신들린 요리 실력이 나의 시선을 붙들어 맸다. 나는 바다를 좋아하고 요리, 더 정확하게는 먹는 데 관심이 많다. 노후를 바다가 있는 지방 도시에서 보내고 싶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외딴섬과 싱싱한 바다가 나를 매혹했다.

만재도 어촌 마을에 있는 작은 집에서 차승원 씨와 유해진 씨가 전등을 끄고 누우면 나도 텔레비전의 전원을 껐다. 그런데 불쑥 '1988년'이 등장하고 거기다 대고 '응답하라'는, 제목이 그런 드라마가 이어졌다. 우연히 첫 회를 다 보았는데 결국 '완주'했다.
식구들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어둑한 골목길에서 나누는 사랑의 이야기가 쉴 사이 없이 이어졌다. 말을 느리게 하는 천재 기사가 여주인공과 사랑을 완성했는데, 나로서는 '어남류'든 '어남택'이든 상관없었다. (정환이가 안되기는 했다. 미적거리면 다 저렇게 된다)

드라마가 끝나자 이런저런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완성도를 따지면 남아날 드라마가 어디 있는가. 나는 쉬는 날 오전 동네 목욕탕에서 주인이 틀어놓은 드라마를 볼 때가 있다. 어깨너머로 풍월을 익힌 나는 왜 진실이 배우의 독백으로 드러나고 반드시 그걸 엿듣는 사람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연극영화학의 전통이 강력한 대학교를 나왔다. 국문학과와 연극영화과 학생들은 시나리오나 희곡과 같은 장르를 함께 공부했다. 거장 유현목 감독, 희곡작가 김흥우 교수가 가르쳤다. 함께 공부한 선후배나 동료 가운데는 나중에 배우나 연출자로 성공한 사람이 적지 않다.

누구든 비판할 수 있고, 그들의 비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작품의 완성도 따위에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주인공들이 쌍문동을 떠나던 날 나도 드라마와 작별을 고했다. 텔레비전의 전원을 끈 다음, 나의 눈과 귀에는 선명한 기억이 아로새겨졌다. 쌍문동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부른다.

"아무개야~! 밥 먹어어~!"

소설가 최인호 선생이 수필집 '산중일기'에 썼다. '해가 떨어질 무렵이면 어머니가 골목길에 나와 이렇게 소리 지르곤 하셨다. "얘들아 밥 먹어라. 그만 놀고 들어오너라." 그러면 우리는 흙먼지 털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내일 또 만나서 놀자." 기약 없는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쌍문동의 드라마는 나를 과거의 한 시기로 초대했다. 천재 기사 최택 사범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 시절로 꼭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과거로의 회귀는 죽음과 종말을 닮았음을 우리는 안다. 그 끝이 영겁이거나 미지이기에, 과거로의 회귀는 또한 종말을 향한 여행이다. 어느 길을 가든 우리는 영원을 향한 문, 그 앞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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