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아버지는 왜 제게 빛과 빚을 함께 줬나요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아버지는 왜 제게 빛과 빚을 함께 줬나요
AD
원본보기 아이콘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정치권력 지도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증의 역사는 반복됐다. 과거 왕정시대에는 정치권력 역시 경제적 부(富)나 경영권과 마찬가지로 상속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민주주의가 실시된 이래로 정치권력은 더 이상 대물림하기 힘들게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정치인들은 정치권력을 사유물로 여기며 '가업(家業)상속'을 꿈꿨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이었던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는 원래 권력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다. 이 전 대통령은 전처와의 사이에 이봉수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미국에 있던 시절 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가 된 이 전 대통령은 83세 되던 해에 아들을 얻었다. 이기붕 부통령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이강석은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 됐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게 그를 '황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서울대 법대에 편입했지만 부정편입 논란이 일며 학교가 시끄러워졌다. 급기야 서울대 법대생들의 동맹휴학 사태가 촉발됐고, 서울대 법대를 자퇴해야만 했다. 이어 그는 당대의 또 다른 엘리트 코스였던 육군사관학교에 재입학했다. 그는 육사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해 군사교육을 받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당시에는 이강석을 사칭하고 다닌 사람이 나타났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당시에는 이 전 대통령이 이강석의 친아버지 이기붕 전 부통령에게 권력을 물려줄 것으로 예상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의 아들이었던 이강석 역시 훗날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정치권력의 상속 작업은 4·19혁명에 의해 허무하게 끝났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하야하자, 이강석은 자신의 친아버지였던 이기붕 전 부통령과 친어머니, 동생 등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치권력은 최고권력자에게 잠시 위임된 것일 뿐 사유물이 될 수 없음을 재확인해준다.

이후에도 대통령과 그들의 자녀의 관계는 한국 정치의 큰 골칫거리였다. 일상의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노출되는 삶을 사는 대통령에 비해 아무런 직위와 책임도 가지지 않는 대통령의 자녀는 '소통령'으로 불리며 직간접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최고 권력자인 아버지를 수시로 만나 면담을 나눌 수 있었던 소통령(小統領) 주변에는 권력과의 연결 통로를 찾았던 이들이 숱하게 몰려들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은 국정개입과 비리 등으로 구속됐다. 김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핵심참모역할을 했던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인맥 등을 통해 여권과 청와대 핵심 부서를 장악했다. 이외에도 재계, 심지어 군부까지도 그의 손이 닿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모든 길은 소산(小山·김영삼 전 대통령 호 거산에 빗댄 별칭)으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 처음 구속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삼형제 역시 애증의 시간을 겪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 홍업씨는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으로 근무하며 이권에 개입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았고, 결국 알선수재 혐의 등으로 구속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셋째 아들 홍걸씨도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되어 구속 기소됐으며, 큰 아들 홍일씨도 나라종금 로비 의혹에 연루되어 불구속됐다. 세 아들 모두 비리 등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자녀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굴레가 씌워졌다. 형님이었다. 노건평, 이상득 두 대통령의 형은 정권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두 정권 모두 대통령의 아들이 있었지만 비리 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특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때를 타기엔 상대적으로 이들의 나이가 어렸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30년의 시간이 지나 최고 권력이 상속된 사례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9대 대선에서 승리할 때 가장 큰 조력자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5대에서 9대까지 무려 19년간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를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오늘날 가장 국민을 잘 이끈 대통령으로 칭송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단단한 지지기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과정에서도 박 전 대통령과의 애증의 관계는 여전히 작용했다. 박 전 대통령의 공(功)과 함께 과(過) 역시 상속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2012년 9월24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은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민주주의 가치"라며 "그런 점에서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박근혜 당시 후보자는 "국민이 저에게 진정 원하시는 게 딸인 제가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을 원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인간적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고권력이 아닌 국회의원 단위로 눈을 돌리면 정치권력의 가업 상속은 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지난 19대 총선 서울 중구에서는 3명의 2세 정치인이 격돌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당시 후보는 정석모 전 의원(6선)의 아들이었고, 정호준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는 신민당 부총재를 지낸 정일형 박사(8선)의 손자이자 중구에서만 내리 5선을 했던 정대철 전 의원의 아들(5선)이었다. 또 이 지역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까지 지냈던 조병옥 전 의원의 아들이자 7선이었던 조순형 전 의원은 자유선진당 후보로 나섰다 불출마를 선언했다. 조 전 의원은 후보 사퇴를 밝히며 "서울의 중심에서 3당 대결구도를 형성해 제3당 진출의 계기로 삼고자 했는데 언론이 정치가문 2세 정치인들의 대결구도가 형성됐다고 보도하면서 3당 대결구도는 변질, 왜곡됐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19대 국회에는 정치인 2, 3세 의원들이 10여명이 입성했다. 여당에는 김용주 전 의원의 아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12대 대통령 후보를 지낸 유치송 전 의원의 아들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새누리당 의원), 한나라당 부총재를 지낸 김진재 전 의원의 아들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 유수호 전 의원의 아들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남평우 전 의원에 뒤를 이어 31세부터 국회의원 시작해 내리 5선에 당선됐던 남경필 현 경기지사, 정재철 전 의원의 아들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 정운갑 전 의원의 아들 정우택 정무위원장(새누리당), 김동석 전 의원의 아들이자 김윤환 전 의원(5선) 동생인 김태환 새누리당 의원 등이 있다. 야당에는 정치인 2, 3세 대전에서 승리한 정호준 의원 외에도 마포갑에서만 5선을 지낸 노승환 전 의원의 아들 노웅래 새정치연합 의원(재선)과 김상영 전 의원의 아들 김성곤 새정치연합 의원(4선)이 있다.

19대 현역 의원 중에서도 일부 의원들은 지역구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고민하는 의원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의 이름과 탄탄한 지역 조직 기반을 넘겨줘 가업을 잇겠다는 뜻이다. 여전히 관건은 유권자가 이를 허락할지 여부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포토] 외국인환대행사, 행운을 잡아라 영풍 장녀, 13억에 영풍문고 개인 최대주주 됐다 "1500명? 2000명?"…의대 증원 수험생 유불리에도 영향

    #국내이슈

  • "화웨이, 하버드 등 美대학 연구자금 비밀리 지원" 이재용, 바티칸서 교황 만났다…'삼성 전광판' 답례 차원인 듯 피벗 지연예고에도 "금리 인상 없을 것"…예상보다 '비둘기' 파월(종합)

    #해외이슈

  • [포토] '공중 곡예' [포토] 우아한 '날갯짓' [포토] 연휴 앞두고 '해외로!'

    #포토PICK

  • 현대차 수소전기트럭, 美 달린다…5대 추가 수주 현대차, 美 하이브리드 月 판매 1만대 돌파 고유가시대엔 하이브리드…르노 '아르카나' 인기

    #CAR라이프

  • 국내 첫 임신 동성부부, 딸 출산 "사랑하면 가족…혈연은 중요치 않아" [뉴스속 용어]'네오탐'이 장 건강 해친다?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