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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지백수흑(知白守黑)(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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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바둑에서 쓰는 용어인듯 하지만, 서예에서 애용하는 말이다. 백은 먹물이 닿지 않은 여백이며 흑은 먹물이 있는 자리를 말한다. 여백을 알고 먹물을 지킨다는 뜻이다. 명말 청초의 달중광(?重光)(1623-1692)이 저술한 서론서인 서벌(書筏)에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먹물이 묻어있는 것을 헤아려 경계를 이루고, 여백의 깨끗한 것으로 전체의 구성을 한다."

글씨를 쓰는 사람은 대개 먹에만 주목하게 되고 먹으로만 무엇을 표현하려 하기 쉽다. 하지만 먹과 여백은 채우려는 것과 비우려는 것의 긴장으로 이뤄져 있다. 글자와 글자 사이, 행과 행 사이. 혹은 획과 획 사이. 성김과 빽빽함이 리듬을 만들어내고 역동성을 만들어내고 고요함을 만들어내고 여운을 만들어낸다. 먹물은 현재의 강렬한 생생함을 만들어내고 여백은 영원으로 향한 무한한 맛을 만들어낸다. 먹물은 풍체이며 기운이고, 여백은 의취이며 향기이다.
어디 글씨만 그렇겠는가. 사람의 말도 먹물과 여백이 있고, 사람의 글도 먹물과 여백이 있으며, 사람의 행동과 사람의 됨됨이와 관계도 그렇다. 사람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치, 모든 예술, 모든 풍경이 또한 그렇지 않던가. 내가 하는 편집 일이나 디자인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여백을 알지 못하면 천재적 표현도 제풀에 죽게 마련이다. 여백이 지나치면 휑하고 여백이 빡빡하면 답답하다. 여백에 흐르는 음악적인 기운을 이해하지 못하면, 멋이나 맛이 깃들 여지가 없다.

삶의 어떤 때는 먹물이 필요하고 그 먹이 휘갈기는 일필휘지의 단호함이 필요하지만, 삶의 어떤 때는 뒤로 물러나 앉아 마음을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있는 여백이 필요하다. 먹물의 도를 지키되 여백의 도를 마음에 두는 것. 저 지백수흑이 오늘만큼 와닿는 날이 있었던가.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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