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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24. '파이란' 자꾸 그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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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이란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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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생겼습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 덕분에 여기서 일할 수 있습니다.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꼭 묻고싶은 말이 있습니다.
강재씨...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2001년...봄...당신의 아내 파이란

영화 파이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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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의 편지를 몇번이나 읽으며 눈시울을 자극하는 열기를 느낀다. 이 여인의 어눌한 말투와 수줍고 두려우면서도 오롯한 마음에 생각을 뺏긴다. 거기엔 내가,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이 있다. 통곡하며 무너지고 싶은 이 삶의 가건물 아래 넉넉한 언덕으로 숨쉬고 있는 무엇이 있다.

음울하고 시시껄렁한 깡패 영화로 시작하는 초반부에서 나는 어느 후배가 그토록 열을 내며 홍보했던 이 영화가 고작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당혹을 느끼고 있었다. 후배를 믿었기에 이런 말은 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건 아니겠지?" 품성이 기본적으로는 선하고 어벙해서 깡패사회에서 한참 뒤로 밀린 이강재(최민식 役)는 조무래기 조직의 건달 사회를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인간이다. 이강재의 쪼다스러움에 너무 초점을 맞추다 보니 '묵고지비'와 '갈지마오'로 한 동네의 평화를 축내던 건달들이 희화화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튀어나온 웃옷 섶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배를 득득 긁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해대는 건달의 모습에는 꽤 괜찮은 리얼리티가 있다.


영화가 긴장을 얻기 시작하는 건, 보스가 된 이강재의 친구가 상대파 조직원을 살해한 뒤부터이다. 보스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강재에게 죄를 대신 자백해줄 것을 부탁한다. 거기엔 조건을 단다. "10년 정도 옥살이를 할 것인데, 그 대가로 네가 꿈꾸던 배 한척을 사주겠다. 그 배를 몰고 네가 살던 섬으로 돌아가라." 이까지가 파이란이 등장하기 전에 관객에 보여진 사건의 진행상황이다.

영화 파이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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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강재에게 들이닥치는 아내의 죽음 소식은, 영화를 아주 다른 국면으로 바꿔나간다. '친구'계열의 깡패 영화가 아니라, 사랑과 삶에 관한 성찰을 제안하는, 멜로로 넘어간다. 이 영화는 눈물을 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점에서 진짜 최루의 분위기를 지닌다.


영화 '파이란'이 잊을 수 없는 매력을 지니게 된 것은, 강백란(홍콩배우 장백지役)의 청순한 인상과 어눌한 말투,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한 남자를 응시하는 깊고 투명한 눈매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에서 홀어머니를 여읜 강백란은 한국에 산다는 이모를 찾아 이 땅으로 건너온다. 그러나 그녀의 이모는 이미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다. 돌아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머무를 곳도 없는 신세가 된다. 이런 그녀에게 남편 명의를 빌려주는 사람은 이강재다. 남편 명의가 있으면 이 땅에서 안 쫓겨나도 된다. 강재가 착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소개소에서 그녀를 팔아치워 값을 챙길 계산을 하고 있다. 이 일을 도와주는 강재에겐 약간의 팁이 돌아온다. 더러운 거래다.


강백란은 술집으로 팔려가는 위기를 재치로 넘긴다. 일부러 피를 머금어 폐병 환자의 흉내를 낸 것이다. 이런 그녀의 기지는 영화에서 복선이 되어, 진짜, 같은 병으로 죽어가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후 백란은 강원도의 어느 세탁소에 취업을 하게 된다. 그녀의 세탁소 생활은 고되고 위험에 차있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 나라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게 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한다. 한국이란 땅에서 오직 하나 우연히 인연을 맺은 명의상의 남편 이강재를 그리워하게 되는 과정은 그녀의 편지에 기막히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불법체류자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남편의 인상을 익히려 자꾸 들여다 보았더니 그만 좋아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백란에게 이 사람은 자신을 구원해준 "가장 감사한" 은인이다.

한번도 제대로 만나지 않고, 또한 상대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사진 한장에 그리움을 쏟기 시작한 이걸 사랑이라 부를 순 없을지 모른다. 그건 어떤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불안하고 고통받는 밑바닥 삶이 희구하는 의지처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강재가 그녀를 재발견했을 때 그녀는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편지에서 '깊이 좋아하는 마음'을 읽어낸 뒤 강재가 흘리는 눈물은, 사랑이라는 이름보다는 안타까움과 슬픔이란 감정에 가깝다. 그가 모르는 사이 그를 향해 그토록 애타게 그리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은 시시껄렁한 삶을 살아온 한 존재를 바닥부터 뒤흔든다.

영화 파이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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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성 감독이 '사랑에 관한 성찰'을 이야기한 것은, 저 엇갈린 사랑이 의미하는 삶의 비극과 진정성에 대해 영화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리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로 향해지는 한없는 사랑. 그것이 설령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릴 순 없을 지라도 '사랑'이란 개념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지고지순의 감정이 아닐까. 몰래 찾아온 인천에서 그녀는 비디오 가게에서 날건달 이강재를 본다. 그에게 말할 '대사'를 연습하는 사이,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붙잡아 간다. 불법 포르노 유포 혐의로 그는 열흘 간 구류생활을 한다. 그는 길에 서있던 명의상의 아내와 엇갈리며 멀어져 간다. 이 기구한 만남 또한 사랑이 토착하고 있는 만만찮은 현실을 다시 돌아다보게 한다. 삼류깡패에게 보내는 불법체류자의 '일류'의 그리움이란 냉소적인 기색이 있는 이 영화의 홍보 문구는, 사랑이란 오히려 저 밑바닥의 척박 속에서 더욱 티없고 고귀하게 자라날 수 있다는 보편적 믿음을 뒷받침해준다.

이 영화는 '철도원'을 쓴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의 '러브레터'를 밑그림으로 썼다고 한다. 철도원의 비장하고 순수한 감동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선, 이 영화의 바닥에 깔린 비극적 미학을 새롭게 보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역순으로, 강백란이 죽은 뒤 이강재는 보스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보스는 뒤쫓아와 이강재를 죽인다. 지난 봄 바다에서 찍은 강백란의 비디오 '파이란 봄바다'를 보는 그를 목졸라 죽인다. 풀려가는 동공으로 강재는 비디오 속 저편 바다의 아내를 꿈꾸듯 바라본다.

인사동에서 백란(白蘭)향이라는 향초를 하나 사왔다. 정신을 맑게 해줘서 독서할 때 좋은 향이다. 그 향 이름을 중국말로 읽으면 '파이란'이 된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된다. 이제 그 향기는 한 남자를 아무 조건없이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저 여인의 시선과 클로즈업될 것이다. 슬프다. 자꾸 그 여자 생각이 난다. 파이란의 편지를 흉내내서 그녀에게 이런 러브레터를 써보기도 했다.

“많이 늦었지만,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당신 사랑해도 되나요. 시간을 믿으세요? 시간이 우리에게 좋은 일만 한 건 아니잖아요? 당신 또한 좋은 당신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당신도 있었어요. 어쩌면 좋음이나 그렇지 않음이란 시간이 당신에 칠한 빛깔일 뿐,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한결같은 당신이 아닐까 싶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을 주저해온 건, 어쩌면 저 시간이 해놓은 일을 당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좋았던 당신을 미웠던 당신이 헐뜯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요. 그 어지러운 시간을 데려와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을 미워할 생각 없거든요. 그냥 당신이면 돼요. 이렇게 간단한 것을, 너무 어렵게 풀었네요.

영화 파이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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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에게 말했던가요. 당신과 내가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다만 이제 공유하는 추억이란 자산이 생긴 것일 뿐이라고. 많이는 좋고, 일부는 시간이 흠집내긴 했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이쁜 구석이 많은, 기억의 완물 하나를 함께 가진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가요. 우린, 이제 새롭게 여기 와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고. 사랑했던 흉터를 매만지며, 지금부터는 더 괜찮은 사랑이 시작될 거라고. 내가 말했던가요. 우린 기억을 모욕하지 말자고. 우린 그것을 꺼내 아파하지 말자고. 그것들은 우리의 축복, 우리를 불행에 감염시키지 않고, 오로지 더불어 웃을 수 있는 팁만을 주는, 추억자산이라고. 슬픈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처럼, 추억은 오직 즐거운 것이라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아니 비수같은 원망들이 그믐달처럼 하늘을 찔렀던 날들이 있었던 것 인정해요. 아팠던 거 인정해요. 당신을 아프게 했던 거 인정해요. 당신과 내가, 서로를 향해 울면서, 사랑 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돋아난 마음을 부정하며 울었던 거 인정해요. 그 미안함까지, 그 야속함까지, 돌아보면 그대로 있는 거 인정해요. 당신이 없었더라면, 미움도, 사랑도 없었겠지요. 당신이 없었더라면 이 기꺼운 재회도 없었겠지요. 그 미움 동안에, 나를 많이 키워준 것, 감사해요. 그 미움 동안에, 여전히 당신 잘 살아있어준 것, 감사해요. 이제는, 잘 사랑하고 말거예요. 당신을 서운하게 했던 것, 나를 서운하게 했던 것, 당신과 내가 흘린 눈물, 그걸 따뜻하게 기억할 게요. 당신, 미웠던 그 이전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예요. 다시 사랑해도 되나요. 사랑하게 해주세요.“<빈섬 러브레터 - ‘다시 사랑해도 되나요’ to 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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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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