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씨의 수기는 어느 평화로운 일요일에 한 통의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드씨는 상관이 "열흘 이내로 한국으로 출전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한국이 어디냐"고 반문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어딘가에서 또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도 처음 듣는 상황이었다. 6주 된 어린 딸과 아내를 고향인 조지아주에 데려다놓고 황급히 장비를 챙겨 일본 오키나와로 출발한 것이 우드씨의 참전 첫날이었다.
사진까지 포함하면 약 50페이지에 이르는 수기에서 우드씨는 인천상륙작전, 흥남부두 철수작전 등에 참여했던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험했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기술했다. 레이더 기술병 등을 이끌고 미군을 지원한 이야기, 찬이라는 이름의 한국 소년과의 우정, 길 잃은 개를 키우던 이야기, 북한군의 기습 예고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떨었던 밤, 그리고 흥남부두 철수 당시의 비참한 모습 등을 생생하게 담았다.
이날 행사에는 우드씨와 같은 참전용사들이 20여명 참석했다. 미국은 참전용사들에 대한 예우와 희생을 기리는 추모에 있어서 어떤 나라보다 철저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전'이라 부르는 6ㆍ25에 대해서도 매년 기억하고 기념한다. 두 나라의 국가를 부르고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잊지 않고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따라 부르는 참전용사도 있었다. 이들은 연령이 대부분 70~80대에 이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행사에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들 참전용사에게 6ㆍ25는 개인적인 의미가 큰 전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6ㆍ25는 역사적으로 잊힐 수 없는 전쟁이다. 우리 땅에서 일어난 가장 큰 비극의 하나인 6ㆍ25 전쟁에 대해 우리가, 그리고 다음 세대가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고, 교훈을 얻고 있는지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91세 참전용사의 생생한 6ㆍ25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쉽게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아이러니다.
이은형 미 조지폭스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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