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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영광된 조국'은 결코 구호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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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말하자면 나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가는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해 나의 태생에 이토록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줬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의지와는, 아니 부모님의 의지와도 무관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의미 부여는 나 뿐 아니라 또래, 그리고 헌장이 제정되기 전에 이 땅에 살던 모든 국민들에게도 적용된다. 헌장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1994년 사실상 폐지되었으니 좀 더 확실히 하면 지금 20세 이상 대한민국 성인은 모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게 틀림없다.

김동선 기획취재팀장

김동선 기획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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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미려한 문장으로 구성된 393자의 이 헌장은 1968년 제정된 이후 26년간 초ㆍ중ㆍ고 교과서에 실렸다. 우리는 이를 한 단어 한 토씨도 틀리지 않고 외워야 했고 이 헌장이 몇 글자로 되어 있느냐는 다소 황당한 시험에 답까지 해야 했다. 나를 포함한 국민은 헌장이 제시한대로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해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해야'했다. 국가는 그렇게 국민이 개조되길 바랐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사고 당일 이후 실낱 같은 희망으로 기다리던 구조 소식은 단 한 차례도 전해지지 않았고 아직도 12명은 실종자로 남아 있다. 승객보다 먼저 배를 빠져나간 선장과 선원들을 보면서 울분을 토했고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따르느라 희생된 많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미안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초동 대응부터 사고 수습까지 미숙함 그 자체였던 해경에겐 한숨이 나왔고 콘트롤타워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정부는 한심했다.

그렇게 두 달이 훌쩍 지났지만 가슴은 여전히 먹먹하다. 오래전 한 시인은 '망각, 그것도 선물이라 할 수 있다면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했다지만 참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이번만큼은 잊지 않겠다는 국민들이 많다. 국민이 국가에 군대와 경찰이라는 합법적인 공권력을 위임한 것은 그 힘의 울타리 안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함이다.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국가의 민낯을 마주하면서 되려 국민의 얼굴은 화끈거린다. 이렇게 세월호 참사는 사고 발생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큰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 우리는 "미개하고"(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 아들 발언)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한 DNA"(문창극 총리 후보자 발언)를 가진 국민으로 전락해 버렸다. 나이 어린 정 아무개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통합의 아이콘이어야 할 총리 내정자의 과거 발언은 가뜩이나 상처받아 예민한 민심을 자극하고 분열을 증폭시켰다. 더구나 국가 개조의 적임자라고 내세웠던 또 다른 후보자가 낙마한 직후가 아닌가. 이유야 어찌됐건 연이은 '인사 참사'는 청와대의 인사 '적폐'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국가 개조를 이야기할 만큼 스스로의 '적폐'를 개조하는 데 얼마나 부단했지는 의문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고 가르쳤다. 국가는 나와 한 몸이길 바랐다. 헌장은 최소한 국가 개발 시대에는 제법 어울리는 구호였다. 정치적 메시지로써의 프로파간다는 간단 명료하고 흡입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지금의 정부에선 헌장이 폐지된 20년 전, 아니 그보다 수십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구호가 난무하고 있다. '4대악 근절'에 '100% 대한민국'부터 '창조경제' '통일대박'에 이어 '국가 개조'까지.

구호 뒤에 구호가, 어젠다 뒤에 또 어젠다가 잇따르고 있지만 정작 어느 것 하나 명쾌하지 않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국가 개조는 세월호 참사 수습과 대응, 원인 규명 과정에서 나온 온갖 '적폐'가 그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개혁 주체인 정부가, 청와대가, 박 대통령이 먼저 개조된 후에야 모든 일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 아닌 듯하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은 구호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김동선 기획취재팀장 matthe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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