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관통하는 상처
핵심은 역사적 사건보다, 그 뒤 사람들에게 남은 감정의 잔재다. 세대를 건너 청년이 느끼는 자기 재창조 욕망과 맞물린다. 정 감독은 이영옥의 1998년 교실과 정순의 기억 회복 과정을 교차해 이를 보여준다. 이영옥은 반장이 되지만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전학생 김경태(박지빈)가 주도하는 집단폭력에 무기력하게 휘말린다. 반면 정순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기억의 파편을 하나씩 불러온다. 제주 곳곳을 누빌수록, 49년 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해진다.
순간 정순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감정의 정체는 역사적 잔향으로 드러난다. 한 시대의 폭력이 설명할 수 없는 고집, 이유 모를 두려움, 과도한 집착의 형태로 지속된 것이다. 영옥이 느끼는 답답함 역시 단순한 사춘기 감정으로 보기 어려워진다. 부모 세대의 침묵이 남긴 결과를 살아가는 세대로 해석할 여지가 생기는 까닭이다.
맥락 없이 주어진 규칙은 젊은 세대에게 종종 억압으로 느껴진다. 영옥에게 개명은 처음엔 단지 촌스러운 이름을 바꾸는 절차처럼 보인다. 현재의 자신을 다시 정의하고, 부모가 부여한 틀에서 벗어나며,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충족되는 과정이 아닌, 그 너머의 진실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옥은 이름에 담긴 역사를 알게 되면서 선택을 바꾼다. 개명이 과거의 서사를 지우고 새 서사를 쓰겠다는 상징적 행위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으로 전해지는 역사
제주 4·3 사건의 기억은 1980년대 후반부터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영화의 배경인 1998년은 그것이 지역의 상처를 넘어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 의제로 옮겨가던 전환기였다. 이전까지는 문학과 예술, 시민사회의 언어로만 존재했다. 소설가 현기영이 '순이삼촌'을 발표하고 연행과 조사를 겪어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정 감독은 개인의 회복과 역사적 치유가 동시에 출발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제주 4·3 사건이 생존자의 현재를 여전히 흔드는 진행형임을 보여주기 위해 기억의 파편을 제시하고, 학교폭력을 통해 국가 폭력의 메커니즘을 은유한다. 동굴에 갇힌 주민들의 공포를 사실적으로 그린 '지슬(2013)' 등과 달리 거대 담론이 결국 개인의 삶에서 어떤 형태를 띠는지 추적한다. 재현이 아닌 공감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정 감독이 오랫동안 제도 폭력을 다뤄왔다는 점을 떠올리면 흥미로운 변화다.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블랙머니(2019)', '소년들(2023)' 등 이전 작품들에선 전쟁터, 법정 등이 진실을 캐내는 공간이었다. '내 이름은'에서는 일상에서 역사의 잔해가 발견된다.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시선이 이동했으나 문제의식은 더 깊어졌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세대는 종종 침묵으로 다음 세대를 길러낸다. 말하지 않은 과거는 가족 안에서 다른 형태로 작동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예민함, 설명 없는 금기, 과도한 불안 등으로. 자식 세대는 원인을 모른 채 결과만 경험한다. 역사적 비극이 후대에 남는 방식이 반드시 교과서적 지식이나 명시적 기억만은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