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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나쁜 나라 사람(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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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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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읽었던 동화나
만화영화들을 다시 읽어보노라면,
거기에는 매우 또렷한 특징이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건 뭐랄까,가치 판단을 하기가 쉽게
되어있다는 것이다.사람을 평가하는
도덕적인 흑백논리의 구분이 자로 긋듯
분명하게, 가운뎃줄 쳐져 있어,
아! 이 사람은 나쁜 사람,
혹은 이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쉽게 나뉘어진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은 언제나 좋고,
끝까지 좋으며,나쁜 놈은 무슨 짓을 해도
나쁘고 꼭 사고를 친다.동화나 만화를
읽는 독자들은 언제나 좋은 사람이 되어,
나쁜 놈들을 미워하고 비난하면서
이야기들을 읽어나간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세상엔 마치 정말 이렇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확연히 갈리는 어떤 잣대가
있는 것같은 착각을 느끼게도 된다.
오죽하면 <형아...저 사람 나쁜 나라 사람이야?
좋은 나라 사람이야?>라는 기묘한 질문이
어릴 때엔 그럴 듯한 정서였을까?
나쁜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나쁘다는 엄청난 매도의 논리와,
그 반대쪽은 무조건 善이라는
또다른 폭압적인 가치부여가,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니지 않았는가.
이렇게 집단화되고 아키타이프화된,
선악의 논리가 어린 마음에 서성거린
가치관의 교과서였다.

하지만 어른들의 소설,어른들의 영화,
어른들의 많은 이야기들은 어릴 때의
이런 독서의 추억들을 많이 수정해놓는다.
세상엔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도 없으며,
또 그 반대도 없다는 사실,
인간은 누구나 도덕적으로 취약한 구석을
지니지 않을 수 없으며,또 그렇기에
그것을 보완하고 자신의 善의 궤도에서
일탈하게 하는 욕망을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불완전함,
칼로 베듯 똑 잘라,착하지도 악하지도 못한,
어중간한 자리에서 갈짓자로 비틀거리며
머릿속의 도덕교과서와 가슴속의 욕망의
싸움에 번민하면서 살아나가는 인간적인
삶의 모양새에 대해 놀라면서 이해하게 된다.
늘 반문하는 질문을 만난다.
나는 착한 사람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나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 속에는 근원적인 존재적
불안감이 배회하기도 한다.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죄지었다는
원죄설의 압박이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살지못하게 하는,
수많은 환경적 속박들과 욕망과
인내의 취약함과 가치관의 혼란들을
늘 만나게 된다.

정말이지 신은 인간에게 왜 쉽게 선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수많은 악의 지뢰밭을
통과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며 살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어 놓았을까?
수많은 유혹들이 매복해있는 인생전선에서,
정말 아름답게 걸어간 인간이야말로 상찬받는
삶의 구조란 얼마나 지독한 신의 편협과 독선을
보여주는 것인가?인간을 늘 시험하는 그 오만한
눈길들을 만난다는 것은 섬뜩한 일이 아닌가?
그런 반문들을 해보게 된다.

요즘 읽고 있는 책 하나는,
나보다 600년에서 800년쯤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문인정치에 신물이 난 군인들이
나라를 뒤집어,폭압적인 군홧발 정치(?)를
자행한 그 시절의 군사정권들은,
권력과 탐욕에 사로잡힌 광기의 인간상을
리얼하게 보여준다.정중부의 반란 이래로,
소위 지식인을 싹쓸이해버린
무뇌아적인 정권들의 테러리즘 앞에서
겨우 살아남은 지식인들의 비굴함과
교활함은 나를 메스껍게 하면서,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혹은 살아간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다시 만나게 한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가치검열들,
즉 도덕교과서를 서슴없이 유린하며,
진정 악인의 길을 걸어간 한 사람을 바라보며,
그가 꿈꾸는 삶이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옛 동화적 가치관으로 말하자면,
정말 나쁜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간 한 인간,
그에게는 과연 아무런 회의가 없었는지
그토록 삶이 자신만만했는지
무엇이 그를 그런 반민족적 광기에 휩싸이게 했는지
의문부호를 수없이 찍어본다.

그런 생각 속에는 우리가 어른이 되었답시고,
절대적으로 착한 인간이나 못된 인간은
없는 법이여!하는 식으로 쉽게 면죄부를 부여하면서,
내던져버린 동화적인 가치관,
즉 <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결론들을
다시 먼지낀 서랍 속에서 끄집어내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숨어있다.착함과 악함의 경계를
애매모호하게 지워버리면서,
오히려 우린, 스스로의 처신의 수상쩍음을
은근슬쩍 감추고 <다 그런 법이여!>로
자위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되물음하게 된다.
서슬퍼런 동화적 善惡의 준렬함으로 나를 돌려보낸다.

뜸을 너무 오래 들였다.
얘기하고자 하는 사람은 1244년에 태어난
홍다구란 사람이다.그는 몽고의 살리타이가 고려에
침입했을 때 싸움도 하지 않고 적에게
항복하고 또 反고려 정부를 세워 철저히
조국을 괴롭힌 홍복원의 아들이었다

홍다구는 요동에서 태어나 성장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천재였으며 탁월한
전쟁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겨우 11살 때 몽고가 침입할 당시,
몽고부대에 종군하여 기막힌 통역으로,
당시 조국의 동포들을 박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1271년 삼별초 봉기 때는 몽고의 토벌대 대장으로
진도와 제주에 출병했는데 어찌나 잔혹했던지,
젖먹이들도 홍다구라는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그칠 지경이었다.
일본 원정 때도 몽고의 대장으로 참가하는데,
군함 건조의 책임자가 되어 동포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일본 원정 뒤에 한때 전우이던
김방경이 원과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자,몽고의 장군에게 고문이 미지근하다며
손수 잔혹한 고문을 실시했는데
온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안남을 정도로
피범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추운 겨울이었는데
발가벗긴 채 고문하여 흘러내리는 피가
얼어붙었다.

이 매국노의 아들이 초지일관,
원의 앞잡이로 조국을 괴롭히며 살다간
삶의 행적들을 바라보며,
선과 악을 나누는 잣대야 말로,
우리를 세뇌하는 제 1번의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을 해본다.홍다구의 경우라면,
그가 태어난 곳이나,자라온 환경이
그를 그런 삶으로 내몬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민족에게는 더할 수 없는 원흉으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몽고 쪽에서 보자면,
참으로 재능있는 젊은이였지 않겠는가?

물론 제 민족을 괴롭히고 팔아먹는
배신자적 행위야 어디서든 칭찬받을 일이 될 수는
없으리라.그러고 보면 惡이란 세상의
보편을 보지못하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고,
그 어리석음이 어떤 환경적 요인들로
강화된 신념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는,
오늘날의 편안한 잣대로 그를 재단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고,그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일정하게 왜곡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
사정에 관해 배려하고 있지도 못한 게 사실이다.)

영화 <레들대령>은 충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한 인간의 우행(愚行)의 삶과 비참한 종말을
매우 인상깊게 보여주기도 한다.
가난하고 비천한 태생을 극복하려,
맹목적으로 조직의 논리에 춤추다가
결국은 비정한 조직의 논리에 다시 제거되고 마는,
이 어리석은 인간의 삶의 풍경화들은
사실 우리 주변,아니 나까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어느 정도 닮아있는
씁쓸한 살이의 현상학이 아닌가 한다.

세상이 어지럽고 삶이 힘들어질 수록,
인성 속에 내재된 강팍함과 잔인함은
활개를 친다.적자생존의 가파른 논리와
너죽고 나살자의 비정한 게임에서
선악의 준렬한 잣대는 숨고,
그저 살아가야 한다는 외눈박이 명령만이
뒷골을 때린다.

이런 시절,이런 날들에,
나는
뜨거워진 이마를 짚으며,
문득 착함과 악함의 옛 동화들을
되읽어본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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