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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담긴 손글씨, 환자도 위로받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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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회사 CEO서 '캘리그래퍼' 변신한 임정수씨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디지털 작업이 보편화된 시대에 아날로그 '손글씨'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 정성스럽게 쓴 손글씨가 눈뜰 기약 없는 환자에게 기운을 북돋아주고 빡빡한 일상에 지친 사람에게 잠시나마 위로가 된다고 믿는 사람. 바로 캘리그래퍼 임정수(56ㆍ사진)씨다.

글씨 속에 '인문학'과 '감성'을 담는다는 그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임씨는 미술 학원은커녕 학창 시절 미술ㆍ서예 등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도 없다. 대학에선 경영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고등학교에서 8년 동안 상업부기를 가르쳤다. 진흥기업에 대리로 입사해 이사까지 올랐던 그는 광고회사 타이거코리아 부사장, 중견건설사 대창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
붓조차 들어본 적 없는 그가 캘리그래퍼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독특하다. 타이거코리아에서 재무 업무를 맡고 있었던 시절 광고에 들어갈 글씨를 외주 업체에 맡기는 비용이 만만찮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직접 써 보겠다고 했어요. 직원들이 비웃었죠." 기초가 전무한 그는 3개월 동안 캘리그래피 수업을 들으면서 기본기를 익혔다. 1995년 일이었다. 임씨가 쓴 손글씨는 직원을 통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알음알음 작업 요청이 들어왔다.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파리바게뜨, 외환은행, 빕스, 포스코건설 등 굵직한 기업의 지면 광고에 글씨를 써줬고 개인의 취향, 무신, 여왕의 교실 등 드라마 타이틀도 임씨의 손을 거쳤다.

고작 3개월 수업 받고 캘리그래퍼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미술 숙제를 해 갔더니 엄마가 해준 것 아니냐며 종아리를 심하게 맞은 적이 있어요." 군에 있을 땐 타자기병으로 입대했다가 차트병으로 발령나 군대 내 공지를 도맡아 썼다는 그는 "그러고 보면 캘리그래퍼의 싹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라며 웃었다.

임씨는 "먹고사는 데 지장 없으니 자신의 손글씨로 돈 벌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8년 전부터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700점이 넘는 작품을 아무나 퍼 갈 수 있도록 공개한 것도 이런 상업적 욕심을 내려놨기 때문이다. 인사동의 한 갤러리는 낙관 없이 임씨의 글씨체를 가져다가 입구에 큼지막하게 써놓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그는 재능 기부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데 최근 아주대병원에서 연 전시회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 중년 여성이 쭈뼛거리며 다가와선 혼수상태인 남편 머리 맡에 붙여 놓겠다며 글씨를 써 달라고 하는 모습에 어느 때보다 붓을 꽉 쥐고 썼다는 임씨. 일면식 없는 젊은 부부는 암에 걸린 아이를 휠체어에 태워 와선 '선생님 글을 너무 잘 보고 있다'며 두 손을 맞잡더란다. 그때 가슴에 퍼져 나가는 뜨거운 무언가의 느낌을 임씨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임씨는 24~28일 국회의원 의원회관에서 전시회 '손글씨 담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명함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굵직한 글씨체를 선호하는 의원들, 보좌진들 사이에서 단연 인기다. 전시회 사흘 만에 국회의원 90여명, 관람객 1500명이 다녀갔다. 이름을 써 주려고 준비한 엽서 3000장은 동이 나기 직전이다. 책과 엽서 팔기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 임씨에게 출판사 사장은 '작가는 한 시간 만 전시회에 있다 간다' '엽서를 팔아야지 거기에 이름을 써 주면 어떻게 하느냐' 등 잔소리를 늘어놨다.

그러나 임씨는 돈 안되는 글씨 써 주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 사람들이 제일 사진 많이 찍는 장소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버나드쇼 묘비명)' 글귀가 쓰인 액자 앞이예요. 매일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이 글귀에 깊이 공감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국회란 공간이 엄숙하고 경직된 공간인데 이 전시회로 여기 사람들이 조금 따뜻해 졌으면 합니다."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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