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답은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문명의 역사는 시스템의 정교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토를 확장하고 인구가 늘수록 관리범위는 넓어지고 시스템은 복잡해진다. 사회의 욕구가 다양해지는 반면 자원은 제한적이다. 시스템의 효율성이라는 가치는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를 돌아볼 때 어떤 사회의 시스템은 그 사회가 전성기일 때나 쇠퇴기일 때에도 시스템 자체는 유사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이러한 유사한 시스템을 갖추고도 전성기와 쇠퇴기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왕조는 아무런 준비 없이 허망하게 기습을 당한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과 당시 선비들이 남긴 역사의 기록을 보면 사실과는 다른 것 같다.
그 후속조치로 국방 시스템과 인력 개편을 단행한다. 4군 6진 개척 이래 국방의 기본개념은 진관체제(鎭管體制)였다. 야인들이 침략할 움직임을 보이면 선제공격을 하고, 전시에는 각 진을 방어하면서 중앙정부에서 진압군을 편성해 투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은 선조 16년(1583년)에 일어난 이탕개(尼蕩介)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중앙군이 내려오기 전에 각 진들이 격파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군사를 집결시키고, 중앙정부에서는 유능한 장수를 파견해 군대를 지휘토록 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진관체제보다 대응속도가 빠르고 경비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또한 우수한 장수들을 발굴하기 위해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이때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을 비롯한 인재 28명이 요소요소에 배치됐다.
그러나 조선은 왜군의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적군은 조선의 국방 시스템이 예상한 반응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침략해왔다. 게다가 시스템을 운용하는 장수와 병사는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시스템을 점검한다. 그런데 상당수는 시스템보다는 예측하지 못한 외부변수와 운용하는 사람이 문제였던 경우가 많다. 사회가 고도화 될수록 변수는 더 많아지고 더 빠른 대응을 필요로 한다. 시스템은 알려진 변수에는 대응하는 최선책이지만, 예측하지 못하는 변수는 얼마나 신속 정확하게 대응하느냐 하는 데에서 성패가 결정되고 이는 결국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람의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인재 관리야말로 효율적인 시스템 운용의 핵심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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