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애널리스트의 자괴감
변준호 유진證 센터장 "내용은 매도인데 의견은 매수"
투자자·기업 눈치 … 10만건 중 매도의견은 달랑 4건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내용은 'SELL(매도)'인데도 투자의견은 'BUY(매수)'인 바보 같은 리포트들이 넘쳐나고 있다."
'매도'의견이 가물에 콩 나듯 하는 리포트 관행에 대해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이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변준호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5일 "삼성전자가 100만원이어도 BUY, 150만원이어도 BUY, 15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가도 BUY인 보고서가 나오고 있다"고 예를 든 뒤 "나도 애널리스트 말을 못 믿겠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애널리스트와 투자자, 기업 등 증권사 리포트를 생산ㆍ소비하는 주체 모두가 '매도' 의견을 원하지 않는 구조적인 원인 때문에 이런 관행이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011년부터 지난 4일까지 국내 증권사에서 발간한 기업 분석 리포트(요약본 제외)는 총 10만6210건에 달한다. 이중 '매도'의견을 제시한 리포트는 달랑 '4건'(0.0037%)에 불과하다. 팔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이색 의견'으로 치부되기에 충분한 수치다.
전문가들은 매도의견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애널리스트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A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10여년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기업들이 애널리스트에게 슈퍼갑(甲)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기업탐방 자체를 거부 당하거나 '매도하라면서 왜 물어보세요?'라고 응수하게 되면 애널리스트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토로했다.
'롱쇼트'(시장에서 저평가된 주식을 사고 고평가된 주식을 매도해 구성하는 포트폴리오 운용전략)에 기반한 헤지펀드 투자자들이 국내 시장에 많지 않다는 점도 이유로 꼽힌다. B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우리나라는 매도를 통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투자자들이 많지 않아 주가가 떨어지면 무조건 기분 나빠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면서 "애널리스트 입장에선 투자자들이 불쾌해하는 일을 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애널리스트의 투자의견을 사실상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변준호 유진투자증권 리서치 센터장은 "애널리스트의 보고서가 공공재처럼 공개되다 보니 보고서의 품질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면서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려고 하는 애널리스트들도 많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최선호주(Top pick) 대상에서 제외한다든지, 중립의견을 내거나 목표주가를 내리는 방법으로 에둘러 '매도' 의견을 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증권업계 내부에서 못 믿을 애널리스트 리포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월 조익재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이젠 마케팅이 애널리스트의 본질이라고 알고 있는 주니어들이 너무 많다"고 비판한 바 있다. 2012년에는 이혁재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가 리포트를 통해 "애널리스트가 부정적인 보고서를 내면 진위를 따져 투자 비중 조절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당장 해당 애널리스트에게 전화해서 욕설과 협박을 일삼고 해당 기업은 탐방을 거절하는 것이 우리네 수준"이라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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