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이상의 독자라면 1997년경 등장했던 '시티폰'을 기억할 것이다. 공중전화 부스에 줄을 선 사람들 옆에서 시티폰을 꺼내 전화를 거는 모습은 당시 첨단 기술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정된 구역에서 전화를 걸 수만 있고 받을 수는 없었던 이 반쪽짜리 서비스는,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휴대전화가 빠르게 대중화되자 불과 몇 년 만에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제품을 만들었는지 의문이지만, 당시에는 공공기관이나 다름없던 한국통신이 주력으로 내세우던 유망 사업이었다. 기술 발전의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한 대가가 얼마나 뼈아픈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최근 한국의 디지털 금융 정책을 보면 이 시티폰의 기시감이 강하게 든다. 현재 글로벌 금융 생태계는 스테이블코인과 실물자산 토큰화(RWA)를 기반으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다. 블록체인의 본질은 암호화 기술을 통해 '인터넷망'을 가치 이전이 가능한 '금융망'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결과, 과거 비자(Visa)나 스위프트(SWIFT)가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전 세계를 잇는 폐쇄망을 구축하고 결제·송금을 처리하며 누리던 독점적 해자가 처음으로 구조적 도전을 받고 있다.
지각변동은 이미 수치로 증명된다.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3200억 달러를 돌파하며 국경 간 결제와 온체인(On-chain) 금융의 핵심 결제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토큰화된 미 국채 시장 역시 100억 달러 안팎의 규모로 팽창했다. 블랙록, 프랭클린 템플턴 등 글로벌 자산운용사는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수억에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운용 중이며, 114조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관하는 미국의 예탁결제기구(DTCC)도 글로벌 금융사들과 함께 토큰화 인프라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반면 한국의 현실은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 한국은행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예금토큰 등 공공 인프라 중심의 실험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정작 글로벌 유동성과 직접 연결될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는 멈춰져 있다. CBDC와 예금토큰 실험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금융의 온체인 전환을 지연시키는 명분으로 작동할 때다.
여당과 금융당국이 금년 1분기 내 제정을 공언했던 디지털자산기본법은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다. 토큰증권(STO) 또한 자본시장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실질적인 비즈니스는 여전히 국내 금융사가 주도하는 닫힌 분산원장 위에서 부동산·미술품 등 비정형 자산의 소액 조각투자에 머무는 수준이다. 우리가 블록체인의 본질을 외면한 채 또 다른 '폐쇄형 인트라넷'을 구축하는 사이, 해외 거래소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한국 주식과 이들을 편입한 ETF까지 토큰화 상품으로 출시하고 24시간 거래를 지원하며 글로벌 유동성을 빠르게 흡수 중이다. 우리가 주도권을 놓친 사이 혁신의 과실이 고스란히 해외 사업자들에게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주요 선진국은 일찌감치 '투트랙(Two-Track)' 전략으로 선회했다. 미국은 연방 차원의 소매용 CBDC 추진을 제한하는 대신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며 민간 혁신을 국가 경쟁력의 축으로 삼았다. 일본은 2023년 6월부터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했고 유럽연합(EU)은 2024년부터 '미카(MiCA)' 법안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포용했다. 특히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프로젝트 가디언'을 통해 이미 2022년에 JP모건, DBS 등 글로벌 대형 은행들과 함께 폐쇄망이 아닌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국채를 토큰화해 실거래하는 데 성공하며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공공 결제 인프라는 중앙은행이 책임지더라도, 글로벌 유동성 확보와 민간 금융 혁신은 투명하게 규율된 개방형 생태계와 시장의 선택에 맡기는 명확한 분업 체계다.
물론 국경 없는 온체인 금융에는 자금세탁 방지(AML), 외환 관리의 어려움 등의 리스크가 동반되는 만큼 신중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통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혁신을 과도하게 지연시키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당국의 역할은 100% 준비자산 증명과 실시간 공시, 외부감사, 상환권 등 정교한 규제를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 섣불리 미래를 재단하기보다 시장의 선택을 존중하는 열린 자세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전 세계 금융 산업은 지금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온체인 위에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만약 한국의 디지털 금융이 우리만의 폐쇄망 속에서 '또 다른 시티폰'을 만드는 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티폰과 와이브로의 교훈은 분명하다. 시장이 외면하는 국가 표준은 결코 미래가 될 수 없다. 지금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훗날 뒤늦게 도착한 글로벌 디지털 금융 지도 위에서 한국의 자리는 영영 찾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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