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2장 혜경이 41
배문자의 사무실을 나와 돌아오는 길, 하림은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다.
다행히 버스 뒤쪽 창가에 자리가 있어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제 막 청동빛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는 도시의 거리를 쳐다보았다.
칠십대의 늙은 여자처럼 보였던 겨울날 오후의 회색빛 거리는 다시 이십대의 젊은 여자로 태어나기 위해 변신 중이었다. 청동빛 어둠을 몰아내며 베이커리와 슈즈살롱의 네온이 휘황하게 비쳤다.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며 하림의 마음은 빈 호주머니처럼 자꾸 허전해졌다. 문득 독한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굳지 배문자와 결부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결혼 소식에 상심하거나 허탈하거나 그런 느낌은,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녀가 꽁지머리와 결혼을 하든, 노랑머리와 결혼을 하든 자기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럴까. 바보같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녀에게 자기 모르는 한 가닥 미련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나..... 다음 달에 결혼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던졌던 그녀의 그 한 마디 말이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리 속에 맴맴맴, 맴돌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얄궂은 게 사람의 마음이라더니 그 소릴 듣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막상 듣고 나니 이상하게 하전해지는 것이었다. 떠나간 버스의 뒷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면 정작 아쉬운 것은 그녀가 떠난다는 사실이 아니라 잠깐 동안이나마 그녀와 보낸 자기의 청춘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일는지도 몰랐다. 어떤 여름날이었던가, 그녀의 지하 단칸방에 누워 손수건만한 창문으로 보던 풍경이 떠올랐다. 어둑한 창문 밖으로 내리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 밖 바로 앞에는 나이 든 목련 한 그루가 서있었다. 반지하 창문으로 보면 목련은 발치와 둥지만 보였다. 무성한 잎새가 드리워 놓은 그늘이 커튼처럼 쳐져 있는 발치에는 봄에 피었다 떨어진 꽃잎들이 보기 싫게 변색한 채 쌓여 있었다. 그런 풍경 위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하림은 몽상에 젖어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만화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런 배문자가 꽁지머리 만화가를 만나 결혼을 한다니 어쩌면 다행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옛 애인이랍시고 선불 인세까지 챙겨주지 않았던가. 아까 슬쩍 봉투를 열어보니 만원짜리 백개, 딱 일백만원이 들어 있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돈이었다.
고마웠다. 단발머리 만화 기획자 그녀는 역시 프로다웠다.
예전에 어떤 선배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여자 하나를 떠나보내는 것은 인생의 강 하나를 건너는 것과 같다고..... 그건 아마도 사랑이었을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너무 아픈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상처를 남기는 넓고도 험한 강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에겐 혜경이가 그랬다.
‘나..... 다음 달에 결혼해.’
아마 혜경이가 그렇게 말했다면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기와 배문자의 사이엔 그런 강 같은 사랑은 없었다. 따라서 이제와서 서로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책임도, 의무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잘 가라. 배문자. 가서 부디 행복하게 살아다오.’
하림은 쓸데없이 그렇게 속으로 혼자 정리하고, 혼자 작별인사를 하였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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