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스토커' 박찬욱 감독 "보석 세공하듯 만든 작품"
[아시아경제 장영준 기자]영화 '올드보이' '박쥐' '친절한 금자씨' 등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들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박찬욱 감독이 이번에는 할리우드로 진출해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전 세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영화 '스토커(Stoker)'는 박찬욱 감독의 첫 번째 할리우드 프로젝트이다.
'스토커'는 18살 생일, 아버지를 잃은 소녀 앞에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이 찾아오고, 소녀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스릴러물이다.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손꼽히는 니콜 키드먼과 차세대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는 미아 바시코브스카, 그리고 영국 출신의 매력남 매튜 구드가 함께 호흡을 맞췄다.
개봉 전부터 언론과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스토커'의 박찬욱 감독을 22일 오전 서울 한남동 그랜드 하얏트 서울호텔에서 만났다. 박 감독은 "인터뷰 하는 게 가장 힘들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게 쉽지 않다"고 농담 섞인 푸념을 늘어놓으며 '스토커'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스토커'의 각본은 이미 보도를 통해 공개된 것처럼 미국 TV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 역할을 맡은 배우 엔트워스 밀러가 집필했다. 국내 팬들 사이에서 '석호필'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은 앤트워스 밀러는 선입견을 우려해 '테드 폴크'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박 감독은 '석호필'의 각본을 각색하며 "소녀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제가 각색을 하는 과정은 완전히 뜯어 고쳐서 새로운 걸 만들고 그런 건 없어요. 원래 갖고 있는 걸 강조하거나 과장하는 정도죠. '스토커'는 소녀가 성장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예요.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죠. 그 쪽으로 초점을 부여했어요."
영화에는 엉클(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와인잔을 밀어주며 1994년 와인이라고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극중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가 태어난 해를 빗대 표현한 것이다. 이 장면이 딸을 위한 영화적 장치가 아니냐는 질문에 박 감독은 "딸 덕분에 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스토커'는 한 소녀가 나와서 어떤 일을 하는 영화가 아니에요. 소녀의 성장을 다룬 작품이죠. 제가 만약 자식이 없었다거나 딸과 나이가 같지 않았다거나, 혹은 아들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딸이) 작품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죠. 엄밀히 말해 제 딸과는 아무 상관없지만, 와인 잔을 내미는 것은 '너도 술 마실 나이가 됐다'는 개인적인 감상이 젖어든 것이라 할 수 있어요."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에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리송한 블랙 코미디가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 '스토커'에서는 이런 박 감독 특유의 블랙 유머가 다소 줄어든 느낌이다. 이에 박 감독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유머처럼 문화적 경계가 뚜렷한 것도 없죠. 웃긴다는 건 그 나라 문화와 언어에 익숙해져야 하잖아요? 물론, '스토커'에서도 유머러스한 장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씀하신 유머는 다루기 까다롭고 미묘한 거 라서요. 첫 영어 영화에서 마음껏 구사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영화는 제 작품 중 상영시간이 가장 짧아요. 유머라는 것은 드라마가 전개되는 도중 여유를 부리면서 샛길로 빠지면서 나오는 건데, 이 영화는 프레임 단위로 손톱을 깔꿈하게 다듬듯이, 정말 보석 세공하듯이 줄로 갈아가면서 그렇게 만든 것이거든요. 그래서 여유가 별로 없었네요."
한국 감독이 미국 할리우드에서 작업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박 감독 역시 처음 보는 미국 사람들과 일을 하는 게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논리를 앞세우는 미국 영화 제작 시스템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도 했다고 밝혔다.
"사실 생각해보면 미국은 그렇게 해 온 나라예요. 그런 시스템이 굳어 있는 곳이죠. 내쉬빌이라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촬영을 하는데 너무 덥고 한국 식당도 없어서 혼났어요. 내쉬빌 날씨를 불평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세제 혜택이라는 이유가 있어서 간 건데. 미국 시스템도 마찬가지에요. 날씨나 지형처럼 그냥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이죠. 거길 간 건 내가 선택한 거고, 그러니 힘들더라도 적응을 해야죠."
박 감독은 함께 미국에 진출한 김지운 감독과의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 만난 두 사람은 덕분에 더욱 각별해졌다는 후문. "경쟁 심리는 없느냐?"는 질문에 박 감독은 "경쟁심 보다는 동지애가 더 크다"고 손사레를 쳤다.
"아시아 감독으로 외롭게 있었는데, 경쟁심 보다는 동지애? 우정? 그런 게 더 커졌죠. 김지운 감독과는 집도 가까웠어요. 걸어서 5분 거리였죠. 그래서 자주 만났어요. 후반 작업을 LA에서 같이 했거든요. 만나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영화도 보고. 서로 제작한 예고편도 보여주기도 했죠. 만나면 주로 각자 현장에서 겪은 얘기나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 얘기, 또 한국과는 얼마나 다른지 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죠."
마지막으로 박 감독은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 '설국열차'에 대해 소개했다.
"완전히 폐쇄된 좁은 공간에서 영화 전체가 진행되요. 그게 왠만한 연기가 아니면 덤벼들기 힘든 영화죠. 저예산 영화도 아니고.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능력이 본때를 보여주는 느낌이예요. 같은 감독으로서 경탄하고 있죠. '설국 열차'는 화려한 로케이션이 없는 대신, 배우들 면면이 훌륭한 작품입니다.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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