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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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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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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이 동철의 연락을 받고 약속 장소로 정한 곳은 동묘 앞이었다.
하필이면 동묘냐, 하는 하림의 말을 묵살하고 동철은 서울에서 거기만큼 싸고, 구경거리 많고, 따라서 편한 데 있으면 말해보라며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말이 그렇지 동묘는 낡고, 할 일 없는 패잔병 같은 늙은 군상들이 무슨 구경거리나 없나, 하고 모여드는 곳이 아니던가. 하림은 그런 곳에 가면 지레 늙어버리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 싫다고 했지만 삼십대 중반 나이에 이미 지레 늙어버린 동철은 오히려 그게 편하다고 했다.
“야, 임마! 우리라구 별 수 있간디? 너나 나나 곧 풀 죽은 김장 배추처럼 될 날이 멀잖어. 그나저나 지하철 가깝고 하니까, 거기루 와. 너 찾는 사람도 있구 말이야.”
“날 찾아? 누가...?”
“하여간 만나보면 알아. 내가 골목 안쪽 맛있고 싼 제주도 흑돼지집 봐 둔 데도 있구. 오랜만에 한잔 하자구.”
그래서 정해진 곳이 동묘 앞이었다.
하긴 아무렴 어떤가. 한 끼 먹고 헤어질 거, 동묘면 어떻고 서묘면 어떠랴.
동철은 하림이랑 군대에서 만난 친구였다. 군대에선 하림이 한 해 먼저 들어간 선임병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같아 전역하고 나서는 서로 터는 사이가 되었다. 허우대도 크고 잘 생겼지만 외형과 달리 사람이 조금 뻥이 있고, 삐딱한 구석이 있는데다 만사에 냉소적이었다. 그것만 빼고 나면 그래도 괜찮은 친구였다.

딴에는 글재주가 있어 자기말로는 예전에 신춘문예에 예선까지 통과한 적이 있다고 했다. 아무튼 지금도 그 재주 덕인지 모르지만 아무개 국회의원 비서실에서 아무개 국회의원의 자서전을 써주고 있다고 했다. 자서전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아무개 국회의원 대신 주례사, 연설문, 발간사, 축사 등을 써주고 매달 몇 푼 받아쓰는 따위의, 말하자면 원고 담당 촉탁이었다.
촉탁인 주제에 자기가 무슨 중요한 업무를 맡은 비서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그 아무개 국회의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한민국 정치에 관한 이야기까지 거창하게 떠벌리고 다녔다.
“아, 대한민국. 이렇게 가면 안 돼요. 완전히 반쪼가리가 날 판이잖아. 아니, 벌써 이미 반쪼가리가 났는지도 몰라. 멀쩡히 가만있는 사람까지도 보수꼴통 아니면 종북 좌파로 갈라서야 하니 이래서 뭐가 되겠나? 대통합이니 뭐니 해쌓지만, 단군 할아버지가 다시 나타나도 안 돼요. 큰일 났어.”
그런 그를 친구들은 한 세기에 한명 나올까말까 한 개똥철학자라고, 줄여서 ‘세똥철’, 더 줄여서 원래 이름따라 ‘똥철’ 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어쨌든 재미있는 친구였다.



김영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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