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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토론식 공판···법원이 확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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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 재판땐 경제상황도 고려 속도 빨라지고 ‘팩트’ 중심 사실심리

[사진 이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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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계를 바라보는 사법부의 시각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법원이 단순히 여론을 의식한다거나 온정주의적 성향에서 탈피해 '진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계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법원이 여론 등 외부요인 보다는 법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냉정하면서도 원칙에 충실한 자세로 공판에 임하면서 '법원이 이번에는 진짜 바뀌는 모양이더라' 라는 수근거림이 법원 주변에서 들려오고 있다.
공판정에 들어서면 마치 100분 토론을 하듯 검찰과 변호인에게 각각 사안별로 15분 정도 시간을 주고 설명하게 한뒤 재판장이 칼로 무자르듯 핵심을 짚어가며 공정한 판정을 척척 내리지 공판장 관람석에서 '과연'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법원의 변화가 사실인지 점검해본다.


#1 지난 2007년 A기업 B 회장은 비자금 조성과 업무상 횡령(특경법상 횡령 및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검찰에 기소됐다. 검찰은 B회장에게 징역 5년형을 구형했다. 법원 재판이 시작된 그해부터 지루한 법정공방이 이어졌다.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는 인정했지만 검찰이 내세운 횡령 등의 혐의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변호팀의 판단이었다. 심리는 1주일에 한두차례씩 열렸다.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8시간 가까이 이뤄졌다. 공판에서 검찰은 B 회장이 어떻게 비자금을 조성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물론 이같은 사항을 재연하는 과정에서 증인 30여명이 소환되거나 출두하는 일이 빚어졌다. 변호인측도 마찬가지다. 검찰에 내놓은 혐의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반대측 증인 10여명을 불러 증언을 되풀이해서 듣는 과정이 이어졌다. 공판에서 비자금 조성 혐의를 인정한 만큼 횡령 부분이 법적 판단의 관건으로 떠올랐다. 어떤 방법으로 돈을 빼돌렸는지에 대한 검찰측 주장을 둘러싸고 불법과 적법, 탈법 등 법리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검찰 역시 공판검사와 기소 검사가 함께 배석해 불법 여부를 둘러싸고 불꽃튀는 두뇌싸움까지 펼쳐졌다. 기존 기업들의 횡령과는 다른 모양새를 나타내면서 법리싸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법원 역시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기존의 형사소송법을 적용할 횡령 혐의와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1심 선고판결까지 법리싸움은 무려 3~4개월 이상을 질질 끌었다.

항소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검찰과 변호인측은 새로운 증거 등을 들고나온다면서 또다시 법정공방을 주고받았다. 항소심은 1심보다 공판 기간이 세달 정도 더 걸려 7개월 만에 마무리가 됐다. 항소심에서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징역 3년형이 선고됐다. 물론 그동안 A기업은 ‘만신창이’가 됐다. 각종 거래가 중단됐고, 직접적인 결재권자인 회장이 구속된 상태로 법정공방이 이어지면서 모든 업무가 사실상 ‘정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기업에 대한 사망선고는 공판진행중 이미 내려졌던 셈이다.
A기업의 한 임원은 “문제는 기업을 바라보는 비난 여론이 아니라 공판과정중 기업의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기업의 생존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원망의 목소리를 높였다.

B회장은 결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한 뒤 모범수로 2년여 만에 출소했다. A기업은 최종 선고 판결과 동시에 B회장을 대신해 임시로 새로운 경영자를 내세워 기업을 운영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사회적 여론에 따라 B회장은 바로 복귀하지 못하고 다시 A기업으로 돌아오는데 1년이란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2 지난해 C기업의 D 회장은 비자금 조성과 업무상 횡령, 배임수재(특경법상 횡령 및 정치자금법 위반)등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검찰은 D 회장에게 징역 5년형을 구형했고 D회장의 변호팀 역시 일부 혐의를 인정했지만 다른 혐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한다고 밝혀 치열한 법정 공방을 예고한바 있다. 과거의 지루한 법정 공방이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법원 공판 첫날부터 분위기는 과거와 사뭇 달랐다. 검찰은 D회장에 적용한 혐의에 대해 변호인과 법리싸움을 벌였지만 ‘속도감’은 완연히 달랐다. 1~3주 사이에 한번 열렸던 공판은 한 달에 3번 가량으로 간격을 좁히며 속도감을 더해갔다. 공판에서도 그저 치고받기식 공방이 아니라 ‘팩트(사실)’ 확인 및 점검이 주를 이뤘다.

검찰이나 변호인단이 절차나 과정 등을 거론하며 시간끌기에 나서면 법원이 곧바로 제재를 취했다. 아울러 양측이 내세운 수많은 증인에 대해서도 법원측이 꼼꼼한 검토를 거친 뒤 실제로 꼭 필요한 사람만 법정으로 불러들였다. 심지어 양측에서 내세운 증인이 법정에서 횡설수설할 경우, 재판장이 직접 진술 여부를 확인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예전에는 볼 수 없던 풍속도였다.

D회장의 대법원 선고공판까지 걸린 시간은 10개월여다. 과거에 비교해 절반 수준으로 공판기간이 확 줄었다. D회장은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업무에 복귀 했다. 10개월 동안 C기업의 피해는 막대했지만 D회장의 복귀와 동시에 해외계약 등을 정상화 시키는 등 기업의 영속적 비즈니스측면에서는 예상외로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리한 법리싸움 지양 사실심리 중심으로
앞서 언급한 두가지 상반된 법원 표정은 경제인들에 대한 법원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로 풀이된다. 법원 공판 과정이 마치 가속페달을 밟듯 속도감을 더하게 된 것도 이같은 시각의 변화가 현실에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한 기업 전문 A 변호사는 “재판장이나 검사들이 과거에 비해 식견과 전문성이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단순히 법리공방만 펼쳐서는 패소할 수도 있다는 분위기도 감안됐을테지만 무엇보다 기업이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고 고려한 흔적이 강하며, 이같은 흐름이 법원이 바뀌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법원이 이처럼 큰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은 과거와 같이 법리싸움에 얽매이지 않고 현 시대상을 제대로 반영하겠다는 의지도 담겨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새로운 법원 풍속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사회적 여론 때문만은 아니다. 기업 최고경영자에 대한 ‘온정주의’ 때문이 아니라 법정싸움에 연루된 기업이 지리한 공판과정에서 타격을 입고 결국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법원이 심각하게 받아들인 결과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A변호사는 “1~2년간 벌어지는 법정공방 동안 경제계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법원이 사실관계를 빨리 파악해 유죄와 무죄 여부를 신속하게 가림으로써 기업에 가급적 나쁜 영향이 주지 않으려는 심사숙고의 지혜가 엿보인다"고 말했다.심리가 빨리 진행되는 만큼 검찰이나 법원 양측 모두 전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특히 혐의만 중심으로 봐왔던 판사들 역시 경제와 관련한 지식이 갈수록 풍부해지고 있다는 것이 공판장을 찾은 기업인들이 내리는 평가다. 한 기업의 임원은 “재판에 참석했을 때 재판장이 검찰과 변호인 사이에서 경제용어를 적절하게 구사하며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짚는 모습을 보며 법원에 대한 신뢰가 생겨나는 듯 했다”며 “물론 그 판사만 해당될지 모르지만 판사들의 지식이 상당히 풍부해지고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고 밝혔다.

경제인에 대한 법원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재판장이 직접나서 궁금한 사항을 묻는 등 마치 시사프로 ‘100분 토론’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경제인에 대한 법원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재판장이 직접나서 궁금한 사항을 묻는 등 마치 시사프로 ‘100분 토론’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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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도 궁금한 사항 물으며 양형에 참고
법원도 현재 공판을 팩트 위주로 신속하게 진행하는 분위기가 예전과 다르다는 점은 인정했다. 법원 관계자는 “과거나 현재나 법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달라진 게 없다”고 일축하면서도 “재판이 시작되면 양측 공방을 통해 이해다툼 보다는 팩트 위주로 법리 싸움이 전개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고등법원 E부장판사는 “과거에는 피고인들 조차 위축된 상태에서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으며, 재판장은 검찰과 변호인들의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 판결에 참고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최근 달라진 법정 풍경은 양쪽의 일방적인 주장에만 귀기울이기 보다는 재판장이 직접 나서서 궁금한 점이나 문제가 되는 부분을 짚어주면서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의견만을 듣고 판결을 내리기 보다는 직접 궁금한 사항을 물어가면 적극적으로 판결에 임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선고 판결 시간도 상당히 짧아지는 추세다. 양형기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배임수재와 위증 등 경제와 관련된 양형 기준은 최근 새롭게 정립됐다.

H변호사는 “법원은 양형기준이 미비하면 형량을 선택하는데 많은 고심을 하게 된다”며 “경제와 관련된 양형기준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새롭게 기준이 정립되면서 법원이 선고를 빨리 내릴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고 풀이했다.

신중해진 ‘법정구속’ 기업인들 쌍수들어 환영
경제인들에게 최악의 상황은 법정 구속이다. 이는 기업이나 회장의 이미지 문제가 아니라 업무가 마비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실제 한 중견기업의 경우, 최고경영자가 구속되면서 기업이 도산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최고경영자가 해결해야 할 어음을 제때 막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최고경영자에 대한 법정구속은 경제 활동 중단이 아니라 모든 업무를 정지시키는 상황으로 이어진다”며 “경제인에 대한 구속 여부를 심각하게 검토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어떤 회사든 최고경영자가 구속되는 즉시 바로 최고경영자를 대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기업은 거의 없다. 최고경영자의 부재를 대신할 사내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를 실질적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우선 모든 법이 그렇다 ‘무죄추정 원칙’은 회사 사내법규에도 적용된다. 한 기업체 임원은 “대부분 회사 사내법규는 최고경영자건 일반 사원이건 어떤 혐의를 받고 구속된다고 해도 무조건 해고 등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회사내에서도 소명할 기회가 존재하는 만큼 회사의 최종 결정은 법원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대부분 기업체의 사내법규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법원의 선고공판까지 ‘속도감’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법원 심리나 선고공판이 오래 걸리면 그만큼 최고경영자의 부재가 길어지고 공백을 메꿀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유죄와 달리 무죄가 예상되는 경우가 심각하다”며 “검찰의 기소부터 법원심리, 1심 선고까지 1년여 걸리면 기업체는 이때부터 사업은 고사하고 생존을 결정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말했다.

법치와 원칙 중요하지만 기업 상황 반드시 고려해야
많은 법조계 인사들이 법원 심리나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아온 것이 바로 ‘여론’이다. 그동안 한국 재벌과 관련해 실제로 어떤 식이든 여론이 들끓으면 법원도 그같은 여론을 알게모르게 반영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기업체 범죄에 대해 법원이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면 법원도 그같은 사회정서와 분위기를 의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지적인 셈이다.

실제 증권가에서 자주 일어나는 금융범죄의 경우, 그룹사나 일반 대기업과 반대로 치열한 법정공방은 적고 심리와 선고가 빠른 편이다. 금융범죄의 경우에는 영향기준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지만 속도감은 일반 기업들 상황보다 빠르다는 것이 법조계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재벌가와 대기업이라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법원이 부담감을 느끼고 있지 않느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J변호사는 “법원은 심리를 오랫동안 열어 확실하게 판단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반대로 금융사기나 주식시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기업범죄에 대해서는 속도감 있게 움직여 여론눈치를 보고 있다는 의식을 지울 수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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