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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의 X-파일]그레이싱어, 일본리그 어떻게 다시 점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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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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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9일 지바롯데 마린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당한 투수 세스 그레이싱어의 영입을 발표했다. 밝혀진 연봉은 3200만 엔(약 4억 5천만 원). 요미우리에서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연봉 5억 엔에 1/15 수준이었다. 몸값 폭락은 2010년 3월 11일 받은 오른 팔꿈치인대 접합수술에서 비롯된다. 이후 그레이싱어는 2년 동안 5승(2패)을 올리는데 머물렀다. 2009년 요미우리에서 뛴 외국인으로는 두 번째(첫 번째는 1999년 발비노 갈베스)로 개막전 선발투수를 맡는 등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던 그였지만 시즌 전 지바롯데가 발표한 선발 순번은 기대 이하였다. 나루세 요시히사, 가라카와 유키, 후지오카 다카히로, 하이든 펜에 이은 5선발이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그레이싱어는 8일까지 4경기에 선발 등판, 29.1이닝을 던지며 3승을 챙겼다. 평균자책점은 0.31. 규정이닝을 채운 퍼시픽리그 투수 가운데 단연 선두다. 지난 1일 오릭스 버팔로스전에서 7이닝 7탈삼진 무실점 호투로 시즌 3승째를 거두자 니시무라 노리후미 지바롯데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센트럴리그 다승왕(16승)에 올랐던 2007년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절의 구위를 되찾은 느낌이다.” 37세의 그레이싱어가 이전의 역투를 재현하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아시아리그 문, 왜 두들겼나
그레이싱어는 최고 152km, 평균 141~148km 구속에 코너워크가 동반되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진다. 여기에 더 해지는 왼손타자의 몸 쪽을 파고드는 컷 패스트볼(평균 132~140km)과 절묘하게 떨어지는 서클체인지업(123~132km)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해낸다. 좋은 구위에도 메이저리그에서 실패를 맛본 까닭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손꼽힌다. 비교적 느린 패스트볼 구속(2005년, 평균 144km), 그리고 왼손 타자 공략 실패다. 왼손타자 상대 피OPS(출루율+장타율)은 무려 1.556(2005년)이었다. 마이너리그 트리플A에서는 달랐다. 컷 패스트볼과 서클체인지업은 왼손타자들의 헛스윙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냈다. 그 덕에 그레이싱어는 트리플A에서 뛴 6년 동안 평균자책점 3.80의 준수한 성적을 남길 수 있었다.

사실 그레이싱어는 엘리트코스를 착실하게 밟은 톱클래스 유망주였다. 처음 두각을 나타낸 건 버지니아대학 3학년이던 1995년이었다. 123이닝 동안 12승2패 평균자책점 1.76 탈삼진 141개를 기록하며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재능을 눈여겨 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1996년 신인드래프트에서 그를 1라운드 전체 6번으로 지명했다. 그레이싱어의 야구인생은 이후에도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그해 여름 열린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본선에서 3승을 책임지며 미국대표팀에 동메달을 안겼다. 승리 제물 가운데는 한국도 있었다. 7월 27일 열린 조별 예선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해 이병규(LG), 조인성(SK), 강혁(은퇴) 등이 버틴 한국 타선을 6이닝 2실점으로 틀어막았다. 경기는 미국의 7-2 승리로 돌아갔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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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디트로이트 산하 트리플A 톨레도에서 평균자책점 2.91을 기록한 그레이싱어는 그해 6월 3일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감격을 누렸다. 그는 6승을 챙기며 구단의 기대에 화답했다. 하지만 가장 화려했던 순간 뜻밖의 부상이 찾아왔다. 1999부터 2002년까지 4년 동안 두 차례 어깨수술과 한 차례 오른 팔꿈치인대접합 수술을 받았다. 그레이싱어는 긴 재활 끝에 2002시즌 중반 메이저리그에 복귀했지만 신통하지 않은 성적에 좌절했다. 그해 남긴 성적은 2승2패 평균자책점 6.21이었다. 미네소타 트윈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으로 이적한 뒤에도 뚜렷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2승을 추가하는데 그치며 메이저리그와 점점 멀어졌다. 팔자에도 없을 것 같던 아시아 여정은 그 무렵 시작됐다. 2005년 여름 다니엘 리오스의 대체 선수를 찾던 KIA 타이거즈의 부름을 받고 한국 땅을 밟았다. 첫 해 성적은 무난했다. 6승6패 평균자책점 3.93을 기록했다. KIA는 이듬해 흔쾌히 재계약을 선물했다.

‘복덩이’ 대접해주던 KIA 왜 나왔나
KIA가 그레이싱어를 신뢰한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선수단이 부상자 속출로 창단 첫 최하위로 추락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선발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은 점과 빼어난 리그 적응력이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후배 관계, 감독에 대한 복종, 선수단 내 위계질서 등이 선수생활에 적잖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빠르게 간파했다. 야수들이 실책으로 경기를 망쳐도, 타선의 득점 지원이 형편없어 승리투수가 되지 못해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 감독이 등판을 강요해도, 그레이싱어는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화를 다스리기 힘들 때면 더그아웃 뒤 복도에서 담배를 태우며 자신을 다잡았다. 그래도 마음이 답답하면 쉬는 날 여행을 떠났다. 홀로 자동차 운전대를 잡고 여수, 목포, 진도, 보성 등을 돌아다니며 전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 같은 행동은 선수단, 코칭스태프의 신뢰를 얻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레이싱어는 2006년 다승왕에 도전할만한 투구를 연일 뽐냈다. 타선의 도움을 받진 못했다. 평균자책점 2.84를 기록하며 14승을 챙겼지만 12패를 함께 떠안아야했던 이유다. 타자들은 그에게 미안해했다. 서정환 감독은 “복덩이”라는 말을 남발하며 무한한 신뢰를 내비쳤다. KIA 구단도 가만있지 않았다. 시즌이 한창이던 8월 23일 일찌감치 그레이싱어와의 재계약 방침을 발표했다.

(사진=KIA 타이거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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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는 2006시즌 막판 전년도 최하위의 굴욕을 딛고 두산 베어스와 치열한 4위 다툼을 벌였다.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잠실구장에서 진행된 3연전과 21일부터 23일까지 광주구장에서 펼쳐진 3연전은 두 구단의 운명을 가를 분수령이었다. 그레이싱어는 9월 17일 잠실 더블헤더 1차전에 선발 등판해 7이닝 2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 호투를 선보이며 승리투수가 됐다. 9월 22일 광주에서 펼쳐진 리오스와의 선발 맞대결에서도 6이닝을 3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 승리를 거뒀다. 잇따른 역투에 힘입어 KIA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경사를 누렸다. 리오스를 최우선 영입대상으로 삼고 주시하던 야쿠르트 스카우트 팀에 그레이싱어가 포착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1997년 프로 데뷔 이후 한 번도 한 시즌 180이닝 이상을 던져본 적 없던 그가 오른 팔꿈치 통증을 호소한 것이다. 이미 세 차례 수술로 트라우마가 깊숙이 박혀 있던 그레이싱어는 이내 처음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걸렀다. KIA 구단은 통증을 호소한 지 9일 지난 10월 2일이 되어서야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받게 해줬다. 촬영 결과 원인은 오른 팔꿈치인대 염증으로 밝혀졌다. 남은 시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셈. 하지만 서정환 감독은 검진 결과를 전해 듣고도 “8일부터 열리는 한화 이글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 꼭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레이싱어는 9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준 플레이오프 2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17일만의 등판 탓인지 구위는 이전과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한화 타선을 5.1이닝 동안 3피안타 5탈삼진 1실점으로 막아내며 승리투수가 됐다.

그레이싱어는 준 플레이오프가 끝난 다음날인 10월 12일 미국 버지니아 주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갔다. KIA 구단은 적잖게 오른 조건에 재계약을 제시했다. 그레이싱어는 즉답을 피했다. “알겠다. 천천히 생각해보겠다”라고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 이는 KIA의 우선협상기한일인 11월 30일 이후에도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6일 뒤인 12월 6일 KIA는 일본 매체를 통해 그레이싱어의 야쿠르트 스왈로즈 입단 소식을 접하게 됐다. 발표된 조건은 KIA의 제시액보다 훨씬 적다고 알려진 4800만 엔(약 7억 원).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현지 언론들은 3개월여 뒤 야쿠르트 구단이 1억 엔(약 14억 원)의 계약금을 건넸다고 일제히 전했다. 그레이싱어는 현지 매체의 야쿠르트를 택하게 된 배경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에이스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고 싶었다.” 그가 생각했던 대우는 분명 “복덩이”라는 칭찬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리그를 점령한 사나이

후루타 아쓰야 야쿠르트 감독은 스카우트 팀이 찍어온 투구 비디오만을 보고 그레이싱어 영입을 결정했다. 그는 “직구의 제구, 움직임이 모두 좋다. 무엇보다 체인지업의 낙차가 2002년 센트럴리그 다승왕(17승) 케빈 호지스를 연상케 한다”라고 밝혔다. 그레이싱어는 뛰어난 적응력을 갖췄단 점에서 야쿠르트에서 뛴 호지스와 닮은꼴이기도 하다. 호지스는 올해부터 세이부 라이온즈 북미지역 외국인선수 스카우트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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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싱어는 2007시즌 리그를 바꾼 첫 해에도 불구 한국에서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무려 209이닝을 책임지며 센트럴리그 다승왕(16승)을 차지했다. 압도적이지 않은 구속에도 리그를 정복한 건 서클체인지업과 컷 패스트볼 덕이었다. 두 구종은 한국보다 맞추는 능력이 빼어난 일본의 왼손타자들을 제압하는데 주효했다. 특히 최고 구속 140km의 컷 패스트볼은 왼손타자 몸 쪽으로 날카롭게 꺾여 들어가 많은 땅볼 아웃을 유도해냈다. 일반적인 투수들보다 낙폭이 큰 서클체인지업은 여기에 힘을 보탰다. 보통 서클체인지업은 엄지와 검지를 OK 사인 모양으로 만들어 공을 잡은 뒤 중지에서 약지까지 3개의 손가락을 살짝 걸친다. 그레이싱어의 그립은 조금 다르다. 중지와 약지 사이에 공을 끼우고 검지와 약지를 살짝 걸친다. 스플리터를 연상케 하는 큰 낙차의 비법이다. 그레이싱어는 손목을 활용해 이를 두 가지 형태로 던진다. 종으로 떨어지는 공과 왼손 타자의 바깥 쪽 혹은 오른손 타자의 몸 쪽으로 떨어지는 공이다. 현란한 움직임에 일본 타자들의 배트는 번번이 허공을 갈랐다. 그 덕에 그레이싱어 데뷔 첫 해 159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이듬해 일본 구단들이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레이싱어 영입에 혈안이 된 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야쿠르트를 비롯해 소프트뱅크 호크스, 한신 타이거즈, 요미우리 등이 잇따라 영입 전쟁에 뛰어들었다. 야쿠르트는 바로 2년 6억 엔(약 84억 원)의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특이한 옵션도 붙었다. 모기업인 야쿠르트그룹 수뇌부는 그레이싱어가 버지니아 대학 재학시절 회계학을 전공하고 회계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는 점을 감안, 선수 은퇴 뒤 야쿠르트 미국지사 사장직에 임명할 것을 약속했다. 야쿠르트그룹의 야쿠르트 사업부 해외법인은 30개국으로 퍼져있다. 하지만 아시아를 제외한 시장에서 보이는 매출은 다소 미미한 편이다. 야쿠르트 관계자들은 11월말 버지니아에 방문해 재계약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우선협상기간인 11월 30일까지 사인을 받아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타 구단들에 협상의 문이 열리자 소프트뱅크와 한신은 바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소프트뱅크는 2년 7억 엔(약 98억 원)을 제시했고 한신도 동일한 조건을 내걸었다. 지지부진한 진행 상황을 보고받은 오카다 아키노부 당시 한신 감독은 “2년 전 자유계약선수(FA)가 된 타이론 우즈를 주니치 드래건즈에 뺏기며 필요한 선수는 얼마를 쓰더라도 꼭 잡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며 구단에 더 높은 배팅을 주문했다. 한신은 이내 영입 조건을 2년 8억 엔(약 112억 원)으로 올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싱어는 다른 구단과의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요미우리였다. 당시 알려진 조건은 2년 5억 엔(약 72억 원). 야쿠르트, 소프트뱅크, 한신 등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레이싱어는 가장 낮은 금액을 제시한 요미우리 입단 이유에 대해 “외국인이 생활하기 편리한 도쿄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 우승할 수 있는 구단에서 뛰고 싶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1년여 뒤 요미우리신문의 경쟁업체인 산케이신문은 진실을 보도했다. 요미우리 구단이 제시한 조건은 2년 10억 엔(약 140억 원)이었다.

요미우리 이적 뒤에도 승승장구는 이어졌다. 2008시즌 206이닝을 소화하며 이닝이터로서의 면모를 뽐냈고 막강 타선의 지원까지 받으며 자신의 한 시즌 최다인 17승을 챙겼다. 뒤통수를 맞은 야쿠르트와 한신은 이를 갈며 설욕을 노렸다. 하지만 그레이싱어는 야쿠르트와의 여섯 차례 대결에서 5승(무패) 평균자책점 1.58로 선전했다. 한신도 4승1패로 농락했다. 잇단 승전보는 변덕 심한 와타나베 츠네오 요미우리그룹 회장,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하지만 작은 근심이 있었다. 그레이싱어는 퍼시픽리그 6개 구단과의 교류경기 가운데 유독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 부진했다. 2경기에 등판해 2패 평균자책점 14.00을 기록했다. 앙숙에 가까운 두 구단 관계에 그해 세이부가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은 요미우리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예상대로 그해 저팬시리즈는 요미우리와 세이부의 대결로 압축됐다. 그레이싱어의 부진을 우려한 하라 감독은 그를 4차전 선발로 내정했다. 3차전까지 요미우리는 2승1패로 우위를 점했다. 4차전마저 가져오면 우승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하라 감독의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다. 1회 쿠리야마 타쿠미에게 우익선상 2루타를 허용하며 선취득점을 내준 그레이싱어는 4회와 6회 나카무라 다케야에게 연 타석 2점 홈런을 내줘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썼다. 상대에게 추격의 발판을 내준 요미우리는 결국 3승4패를 기록, 저팬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사진=지바롯데 마린스 홈페이지 캡쳐)

(사진=지바롯데 마린스 홈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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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그레이싱어는 제구 불안에 시달리는 우츠미 테츠야 대신 히로시마 카프와의 개막전에 선발로 등판했다. 결과는 부진했다. 3이닝 동안 무려 6실점을 허용했다. 순탄해 보였던 일본야구 생활에는 그때부터 먹구름이 드리웠다. 평균자책점은 시즌 중반 5점대까지 치솟았다. 이유는 고질병인 오른 팔꿈치 통증. 직구 구속은 크게 감소했고 그 영향으로 타자들은 더 이상 서클체인지업에 속지 않았다. 컷 패스트볼도 왼손타자들의 땅볼을 이끌어내는 마구에서 느린 직구로 퇴색했다. 그럼에도 그레이싱어는 그해 13승(6패)을 올렸다. 한신(4승무패), 야쿠르트전(3승1패)에서의 특유 강세가 지속된 덕이었다. 하지만 악화된 오른 팔꿈치 통증으로 그는 부상자명단에 등록돼 결국 저팬시리즈를 뛰지 못했다. 7년 만에 우승을 거둔 요미우리 선수단 속에서 그레이싱어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부상 악령은 이후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레이싱어는 2010년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오른 팔꿈치 통증을 호소했다. 정밀검진을 위해 그는 2월 28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팔꿈치인대 손상이 발견돼 3월 11일 생애 두 번째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았다. 그레이싱어는 3개월의 재활을 거쳐 그해 8월 3일 한신전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하지만 사라진 이전 구위에 중간계투로 밀려났고 승리 없이 2패 평균자책점 5.48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듬해 성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5승(무패)을 챙겼지만 평균자책점은 4.15로 다소 높았다. 부상자 명단에까지 자주 오르내리자 하라 감독은 7월 13일 1군 명단 제외를 끝으로 그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거듭된 부진 속에서 연봉은 계속 줄어들었다. 5억 엔(약 70억 원)이었던 연봉은 2010년 2억 6천만 엔(약 36억 원)으로 반 토막이 났다. 2011년에는 8천만 엔으로 70%에 가까운 삭감의 굴욕을 당했다.

요미우리 로열패밀리에서 안티 요미우리 선봉장으로

요미우리 방출 이후 그레이싱어는 일본 내 11개 구단에 자신이 선발로 풀 시즌을 치를 수 있는 몸 상태란 점을 홍보하고 나섰다.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전력보강을 꾀하는 지바롯데 마린스와의 교감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는 2월 1일 스프링캠프 개막일에 맞춰 선수단에 나타났다. 일본프로야구 경력이 출중한 외국인선수들은 보름 가까이 늦게 나타나는 경우가 다반사. 하지만 그레이싱어는 일본에서 뛴 6년 동안 한 번도 스프링캠프에 늦게 도착하지 않았다. 성실함만이 자신에 대한 선수단의 신뢰를 높이고 감독의 눈도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레이싱어는 2008년 다르빗슈 유(텍사스 레인전스)와 바비 발렌타인(보스턴 레드삭스, 당시 지바롯데)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ESPN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메이저리그와 아시아리그의 차이로 감독의 권력 차이를 손꼽았다.

“메이저리그에서 매니저(Manager)라고 부르는 감독을 일본에서는 간도쿠(감독의 일본어발음)라고 부른다. 같은 뜻이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메이저리그는 단장(General Manager)이 구단 운영권을 쥐고 감독은 선수단을 관리하는데 집중한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리그 감독은 다르다. 매니저와 단장의 권한이 더해진 형태의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빅 마켓 구단일수록 감독의 권한은 더 커진다.”

일본리그 스트라이크존을 사유화하다

그레이싱어는 8일까지 4경기에 선발 등판해 3승 평균자책점 0.31을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지난 4경기에서 포심 패스트볼의 평균구속은 약 140km였다. 4월 24일 니혼햄 파이터스전에서 151km의 최고구속을 찍었지만 한창 위력을 떨쳤던 2007~08시즌(약 145km)에 비해 평균 구속은 약 5km 정도 감소했다. 하지만 컷 패스트볼은 약 134km로 전성기 때(약 137km)와 약 3km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기에 팔꿈치 상태 회복으로 체인지업의 낙차는 이전의 위력을 재현하고 있다.

(사진=지바롯데 마린스 홈페이지 캡쳐)

(사진=지바롯데 마린스 홈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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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싱어는 선전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손꼽는다. 지난 2년 동안 상체가 빨리 앞으로 나가는 습관을 스프링캠프에서 교정했다는 점과 팔꿈치통증으로 지난 2년 동안 던지지 않았던 커브(평균구속 119km)의 구사다. 각각 제구 향상과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데 도움을 줘 호투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설명이다. 결국 0.31이라는 놀라운 평균자책점의 원동력은 140km 이상을 꾸준히 기록하는 포심 패스트볼, 130km대 스피드로 왼손타자 몸 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컷 패스트볼, 120km대의 스피드로 포크볼처럼 뚝 떨어지는 서클체인지업, 110km대의 커브 등의 절묘한 조화라고 볼 수 있다.

지난 시즌부터 리그에 투고타저를 불러일으킨 스트라이크 존의 확대도 빼놓을 수 없다. 현지 전문가들은 좌우 스트라이크 존이 각각 공 1.5~2개 정도씩 넓어졌다고 입을 모은다. 상하도 각각 공 1~1.5개 정도씩 확대됐다고 전한다. 그레이싱어는 이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2009시즌 60%를 조금 넘긴 스트라이크 비율은 올 시즌 75%수준으로 올라갔다. 스피드는 빠르지 않지만 날카로운 제구를 자랑하는 포심 패스트볼에 다양한 변화구는 넓은 스트라이크존에서 매 경기 춤을 추는 셈이다.

불안요소도 있다. 수술대에 두 번이나 오른 팔꿈치의 상태가 대표적이다. 그레이싱어는 지난 2년에 비해 확실히 좋은 몸 상태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4월 10일 시즌 두 번째 선발 등판 이후 컨디션 난조를 호소, 선발 로테이션을 한 차례 건너뛰었다. 이후 등판은 14일 뒤인 24일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지난 1일 오릭스전에서도 그는 다소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경기 중반부터 오른 팔을 자주 앞뒤로 휘둘렀다.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팔꿈치 통증이 아주 가라앉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결국 그레이싱어의 롱런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스스로의 건강뿐이다. 물론 이는 선수들에게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요소다.

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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