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기가 높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한 장면이다. 세종의 색다른 면을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필자는 진정한 후흑의 달인을 본 듯 했다. 후흑(厚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줄임말로 중국 청나라 말엽 이종오가 저술한 '후흑학'에 나오는 말이다.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속마음을 뜻한다. 우리말의 뻔뻔함과 음흉함 쯤으로 해석되는데 그러다 보니 비겁한 처세술 정도로 오해를 사고 있는 면도 있다.
물론 드라마다 보니 픽션의 소지가 있겠으나, 세종은 서슬 퍼런 태종 이방원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학자들과 글이나 읽겠다'며 심중을 숨긴다. 그에게 후흑이 없었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종대왕'도 없지 않았을까. 후흑의 실천지략 중 대표적인 것이 공(空)이다.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한 가지 일에 전념하되, 인내심을 가져야지 조급하게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오늘 효과가 없으면 내일이 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세다.
또한 반드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그 길로 도망가면 되기 때문에 후사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지략은 농(壟)이다. 귀머거리와 벙어리처럼 처신하라는 뜻이다. 흉중에 깊숙이 감춰둔 목적을 위해 취하는 일종의 연막전술이다. 그래서 후흑을 승자의 전략이라 하는 것이다.
21세기는 서구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가 저물고, 동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대격변의 시기라고들 한다. 미국과 소련, 양강 구도가 무너지면서 중국을 비롯한 새로운 패권 세력들이 등장했다. 구호물자에 의존하던 대한민국 같은 나라들이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최빈국이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풍부한 자원을 앞세워 발언권을 강화하고 있다. 대신 세계 경제를 주무르던 일본은 침몰하고 있다. 전통과 문화의 중심지로 의기양양하던 유럽국가들은 노쇠한 종이 호랑이가 되고 있다. 말 그대로 어지러운 세상, 난세다.
난세를 살아가는 우리도 세상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케케묵은 이념 논쟁을 벌이는 정치권, 탁상공론에 익숙한 관료들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특히 총성없는 전쟁터를 누비는 기업들은 난세의 성공비결, 후흑에 주목해 보자. 또 하나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미나 IGM(세계경영연구원)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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