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탔다. 비 오는 밤길을 달리던 택시가 사고를 낸다. 기사는 그저 개 한 마리를 쳤을 뿐이라고 말하며 황급히 뺑소니를 친다. 뒷좌석의 손님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냥 시각장애인은 아니다. 경찰대를 다니던 중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수아(김하늘)는 그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로 택시기사의 나이와 인상착의를 파악하고 택시가 친 것이 개가 아니고 사람이라고 진술한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 있었던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피자배달을 하는 청년 기섭(유승호)은 자신의 멀쩡한 두 눈으로 똑똑히 사고를 목격했다며, 사고 차량은 택시가 아니라 외제차였다고 증언한다. 보이지 않는 자와 보이는 자.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아니 무엇이 진짜 그날 밤의 진실인가.
<#10_LINE#>
시력 +1.0의 스릴러
“너 지금 나 보여? 나 지금 너 보고 있는데?” 범인이 바로 앞에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공포. 시각체험을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주인공의 시각장애는 반대로 가장 즉각적인 공포의 도구로서의 활용도가 높다. 물론 <블라인드>의 몇몇 장면은 올해 나온 어떤 영화보다 뛰어난 공포의 순간을 안겨주긴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디 아이> 식의 공포영화라기보다는 연쇄살인범과의 쫓고 쫓기는 쾌감을 안겨주던 액션스릴러 <추격자>에 가족의 드라마를 얹은 형태에 가깝다. 이 영화가 액션보다는 구술을 통해,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리듬을 타고 흐를 거라고 예상했다면 그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갈 것이다.
밤늦게 위험한 데 어딜 혼자 가느냐는 걱정에 수아는 대답한다. “나한텐 밤이나 낮이나 똑같아.” 이렇듯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들에게 수아가 살고 있는 암흑 세상을 함께 체험하게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블라인드>는 간단하지만 사려 깊은 장치를 통해 그 어둠의 시각화에 성공한다. 또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범인의 직업이나 안정감 있는 목소리를 통해서도 반론한다. 김하늘과 유승호는 보이지 않는 연기의 중앙선을 균형감 있게 잘 걸어내고, <마음이>, <마음이 2>의 주인공이었던 ‘연기견’ 달이는 수아의 유일한 친구이자 보호자인 맹인안내견 ‘슬기’로 등장해 퇴장의 순간까지 인간을 뛰어넘는 열연을 펼친다. 우리의 시각이 속이고 있는 그 허술한 사각지대 가운데로 뛰어든 <블라인드>는 너무 잘 보여서 피곤하지도, 너무 안보여서도 답답하지도 않는, 말하자면 +1.0의 정도의 시력을 가진 영리한 스릴러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