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서 처음 시행된 '창의·서술형 평가' 직접 풀어보니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경기지역 고교 1∼2학년 학생들은 지난 10일 전국 최초로 '창의ㆍ서술형 평가'를 치렀다. 경기도교육청(교육감 김상곤)은 평가방법의 혁신을 통해 학교의 수업까지 변화시키겠다는 취지에서 이번 시험을 시행했다고 밝혔다. 첫 시험에 참여한 학생 수는 고등학교 1학년 13만2960명, 2학년 12만7931명 등 총 26만891명이다. 전체 409개교 중에서 고1학년 331개교, 고2학년 321개교가 참여했다.
1학년은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등 총 5개 과목, 2학년은 사회와 과학 중 한 과목을 택해 총 4개 과목까지 응시했다. 과목별로 50분 동안 총 8문항을 풀어야 하고, 각 문항은 난이도에 따라 4점, 7점, 10점 등으로 나뉜다.
창의ㆍ서술형 평가가 치러진 첫날, 성남 보평고교(교장 김주환)를 찾은 기자가 2학년 학생들과 함께 오전 9시 1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국어ㆍ수학ㆍ영어ㆍ사회ㆍ과학 총 5과목의 시험을 치렀다. 시험지에 등장한 지문과 문제들은 익숙했지만, 답안지를 쓰는 과정은 생소했다. 수많은 숫자들 위에 마킹해야 하는 OMR카드 대신 칸만 나누어진 백지를 답안지로 받았기 때문이다.
1교시 '국어'시간에는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자신이 아들의 입장에서 답장을 써보라'는 문제가 눈에 띄었다. 재물을 탐하기보다는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긴 지문과 함께 중요한 부분이 비어있는 편지가 제시됐다. 편지를 읽고 정약용이 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을 정리한 다음 답장을 완성하는 것이다.
기자는 답안지에 '형태가 있는 것은 없어지기 쉽지만 형태가 없는 것은 없어지기 어렵다는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유배생활의 고단함 속에서도 청빈한 삶을 살아가시는 아버님을 생각하며 저도 재물에 욕심내지 않고 더 많이 베풀면서 살겠습니다'라고 채워 넣었다.
정약용의 편지는 익숙한 지문이었지만, 그의 아들이 되어 직접 편지를 써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학생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편지를 썼지만,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가면 정답으로 인정된다. 배제현 학생은 "서술형 평가라 걱정이 됐지만, 답안을 작성할 때 지켜야 할 조건이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어 천만다행"이라며 "객관식 시험을 치를 때는 50%만 알아도 답을 쓸 때가 많았지만, 이번엔 90%정도 알아야 정확하게 답을 쓸 수 있어 조금 까다로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2교시 '수학'시험은 생소한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선택지에서 답을 고르는 기존의 시험방식과는 달리 답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답안지에 옮겨야 했다. 대부분의 문제는 '∼구하는 과정을 서술하시오'로 끝났고, 이때 '과정'은 풀이과정과 결과를 포함한다고 시험지에 명시돼 있었다.
창의ㆍ서술형 평가라고 해서 수학올림피아드 수준의 어려운 문제가 출제되는 건 아니다. 학생들은 수학시험에 대해 '대체로 평이하다'고 평가했다. 박동우 학생은 "삼각함수의 성질을 활용해서 도형 문제를 풀어야 하는 8번 문제를 제외하고는 어렵거나 생소한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홍지 학생은 "지금까지 수학문제를 풀 때는 빨리 답만 구하면 됐는데 이제는 구하는 과정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적어야 하니까 시간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3교시 '영어'시간에는 영어로 답하는 문제와 우리말로 답하는 문제가 9대7의 비율로 출제됐다. 우리말로 대답하는 문제는 대부분 학생들의 독해력을 측정하기 위한 문제였다. '은메달 리스트보다 동메달 리스트가 행복한 이유를 주어진 글에 근거하여 우리말로 서술하시오'나 '미국의 소수자보호법(Affirmative action)을 둘러싼 찬성과 반대 입장의 글을 읽고, 반대하는 주장의 근거를 우리말로 서술하시오'와 같은 문제가 출제됐다.
박나혜 학생은 "국어에 비해서 '조건'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아 어떤 단어를 선택해서 문장을 완성해야할지 막막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박동우 학생 역시 "지문해석, 빈칸추론 등 익숙한 수능 유형문제를 풀 때는 지문과 선택지를 짜맞추다보면 답을 구할 수 있었다"며 "선택지 중에서 정답을 고르는 훈련만 해왔지 직접 선택지를 만들어 본 적은 없어서 생각보다 어렵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박하나 영어교사는 "아이들이 영어로 답을 쓰라고 하면 무조건 영작이라고 생각해서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끼는데, 실제 출제된 문제는 글을 짓는 작문이 아니라 한 문장에서 밑줄 친 부분을 채워 넣는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객관식 중에서 '빈칸에 들어갈 말은?'이라는 문제를 보고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면, 이번 시험에서는 '빈칸에 들어갈 말을 영어로 쓰시오'로 바뀐 것이다.
오후에 치러진 '사회'와 '과학'시험에서도 재밌는 문제가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과학과목에서는 '달과 A행성을 찍은 사진'과 '지구와 달의 공전궤도'를 제시하고, A행성이 내행성인지 외행성인지를 쓴 다음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유도 쓰도록 하는 문제가 출제됐다.
기자는 'A행성은 외행성이며, 사진과 같은 밤에는 외행성만 보이기 때문'이라고 썼는데, '내행성은 한밤중에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나 '보름달이 남쪽하늘에 보일 때는 한밤중이므로 외행성만 볼 수 있다'도 모두 정답으로 인정된다.
시험을 마친 학생 모두에게는 채점 기준표와 정답 및 해설지를 나눠주어 스스로 취약한 부분을 진단할 수 있도록 했다. 박승준 학생은 "객관식에서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도 서술하려면 어렵다는 걸 알았고, 서술형에 대비하는 마음으로 공부한다면 다른 시험에서도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홍지 학생은 "처음 보는 방식이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내가 서술하지 못하는 부분과 자신 있게 서술하는 부분이 어디인지 알 수 있어서 취약부분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완기 경기도교육청 교수학습지원과장은 "이번 창의ㆍ서술형 평가를 계기로 창의력 및 문제해결력을 배양하는 평가가 학교 수업에 연계되면서 수업혁신이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경기교육청은 단순지식 암기 및 문제풀이 위주의 학습 형태를 개선하고자 2010년부터 교내 지필평가 배점의 20% 이상을 서술형 평가로 시행해왔고, 올해는 25%이상으로 상향조절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 학부모들은 '서술형 평가로의 전환은 막지 못할 추세지만 수능이 서술형으로 출제되는 것은 아니지 않냐'는 우려를 제기했다. 고2자녀를 둔 학부모 이현순(52)씨는 "결국 아이들은 대학갈 때 수능을 봐야한다"면서 "경기도에서는 수능형 모의고사를 2번, 서술형 평가를 2번 본다고 하는데 수능대비를 위해선 부족한 것 같다"며 걱정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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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선(46)씨는 "시험만 바뀌고 학교 수업은 그대로 주입식 암기교육이라면 이런 변화가 의미가 없다"며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만 평가방식이 바뀜으로써 아이들이 받는 수업방식도 바뀌는 게 맞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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