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열 장관의 외교협회 신년사에 대한 단상
언제부터인가 국제정치, 국방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지정학과 외교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미국의 중국 견제 시대가 도래해 무역분쟁이 벌어졌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글로벌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첨단기술과 자원 분야에서 동맹국들을 위주로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해 가고 있다. 유럽은 국제정치의 역학 관계에서 우방인 미국과 보조를 같이하지만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에서는 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정학과 외교를 모르면 경제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올해 1월3일 대한상의회관에서 열린 '2025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1기 정부 출범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더이상 ‘세계화의 시대, 평화의 시대’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20일(현지시간)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했다. 2019년의 트럼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짜였다면, 2025년의 트럼프는 산전수전을 다 겪고 돌아온 무서운 사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트럼프는 대선 승리 뒤 미국과 과거 연고가 있었던 덴마크령 그린란드 매입과 파나마운하 통제권 회복을 언급했다. 2차 세계대전 후 확립된 평등주의 국제질서, 현상 유지의 원칙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유엔(UN) 등 여러 국제기구를 두고 규범과 절차를 만들어 공통의 문제를 풀자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올해 1월7일 외교협회 신년회 ‘인사 말씀’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윤석열 정부 2년 반 남짓 동안의 외교 기조와 정책에 대한 비판에 맞서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우리 외교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을 많이 했다.
“미국 신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고, 국제관계에 대한 거래적 관점으로 인해 전통적 동맹·우방과의 연대는 물론, 규범에 기반한 다자질서마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선진국들도 같은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틈타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는 국가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강대국 간 전략경쟁도 한층 심화할 것입니다.”
특히 트럼프 2기 정부의 출범과 함께 올해는 우리나라 외교에 중요한 일들도 많다. 오는 11월에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가 개최된다.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과 비전, 발전 전략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다. 올해 우리나라가 의장국이고, 내년에 중국이 의장국을 맡게 된다. 관례적으로 다음 해 의장국의 정상은 당연히 참석하는 자리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4년 이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는데, 11년 만에 시 주석의 방한이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접점을 지혜롭게 활용해 한중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 나가고자 합니다.”
일본과는 국교정상화 60주년이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한국과 일본은 인도, 호주 등과 함께 핵심 국가다.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가 발목을 잡더라도 한일관계 개선과 한·미·일 삼각안보체제는 굳건히 추진해야 할 일이다. “어렵게 일궈낸 한일관계 개선의 흐름을 멈추거나 정체시키기에는, 더구나 국교정상화 60주년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기에는 양국 간 협력의 잠재력과 양국이 공동으로 직면하고 있는 도전이 너무 큽니다…올해는 일본이 의장국을 맡게 돼 있는 한·일·중 협력도 더욱 활성화해 역내 주요 소다자 협의체로 안착시키고자 합니다.”
지금은 명·청 교체기, 구한말 열강들의 각축기와 비견되는 국제정치 질서의 격변기다. “전례없는 지정학적 대 격동기에 기민한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 속에서 우리 외교는 미증유의 국내 정치적 갈등 상황으로 인해 손발이 묶여 있는 형국입니다.”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올해 1년, 조기 대선으로 정권교체가 되더라도 차기 대통령과 외교 당국자들은 부디 국익 수호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국민들도 정치적 대립·분열에 빠져있을 만큼 한가로운 시기가 아니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경제정책 스페셜리스트 정재형 본부장 jj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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