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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칼럼] 비움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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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원 한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노성원 한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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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온라인 강의이지만 어쨌든 대학에서 새 학년 새 학기는 시작됐다. 캠퍼스에서는 지난 2월 말 정년 퇴임하신 교수님들이 학교를 떠나셨고, 3월이 되니 신임 교수들이 새롭게 일을 시작하고 있다. 어수선하기도 하지만 신선한 분위기다. 매년 봄이면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 와중에 기회가 돼 4년 만에 연구실을 다른 층으로 옮겼다. 그동안 쌓아둔 서류가 한가득이다. 이사하는 김에 정리를 하니 버릴 물건이 끝도 없이 나온다. '언젠간 한번은 보겠지. 이건 정말 중요한 문서니까 꼭 보관해둬야 해'라며 소중하게 간직한 것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동안 그토록 찾던 물건을 보물찾기처럼 발견하는 기쁨이 아주 간혹 있기는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대부분은 버려도 무방한 것들이다. 아니, 진작 버렸어야 할 것들이다. 탁자는 본래 용도를 되찾았고, 책상 위에는 책을 펼 공간이 생겼다. 새로운 방으로 옮기니 훨씬 넓어진 느낌이다. 필요한 물건만 남겼기 때문이리라….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강박적으로 수집하고 저장하는 것도 독립적 질환으로 보고 있다.'저장장애'라는 병이다. '수집광'이라고도 한다. 쓸모나 가치가 없는 물건을 수집하고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이 병의 핵심 증상이다. 집 안은 이러한 물건들로 가득 차 활동이 제한되고, 상당한 고통과 기능 장애가 야기된다. 버리지 못하는 물건에 대한 강한 감정적 애착이 있고, 소지품에 포함된 중요한 정보를 잃게 될까 두려워한다.


보관하는 물품은 신문ㆍ잡지ㆍ낡은 옷ㆍ가방ㆍ책ㆍ우편물ㆍ서류 등이 흔한데 모든 종류의 물건이 대상이 될 수 있다. 저장한 물건들로 가득 메워진 생활공간은 더 이상 적절한 용도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부엌에 요리할 공간이 없고 침대에 잠을 잘 공간이 사라지고 의자에는 물건이 쌓여 더 이상 앉을 수 없게 된다. 원래의 용도가 있는 공간에 물건을 어지럽게 산더미처럼 쌓아 잡동사니 쌓기 형태를 만든다. 이로 인해 결국은 대단히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을 초래한다. 예를 들면 잡동사니에 걸려 몸이 다치거나 불량한 위생에 의해 식품이 오염되고 사람이 감염되고 때로는 가전제품이 고장 나 화재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저장장애 환자들은 소유할 목적으로 물건을 저장하며, 이 소유한 물건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고통스러워한다. 따라서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물건이 축적되는 경우나, 소유를 포기해야 할 때 고통스럽지 않다면 저장장애가 아니다. 저장장애와 가장 흔히 동반되는 질환은 우울증이다. 저장장애 환자의 절반에서 발견된다. 불안장애도 25%에서 관찰된다.

그렇다면 이 병은 왜 생길까? 연구에 따르면 유전적 요인도 영향을 미치고, 대뇌손상 환자의 경우에도 저장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성격적으로는 우유부단함이 특징이다. 저장장애는 평생에 걸쳐 나타날 수 있다. 저장 증상은 10대의 이른 나이에 시작돼 20대에 이르면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기 시작한다. 30대에는 임상적으로 현저한 장애가 발생한다. 연령이 높아지면서 증상은 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비운 만큼 채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공간이 필요하다. 연구실의 여백을 바라보니 의욕이 생긴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오늘도 작지만 여유 있는 공간으로 발걸음이 향한다. 요즘같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시기에 집 안을 둘러보자. 혹시 버려야 할 것을 쌓아두고 사는 건 아닌지. 기왕 둘러보는 김에 내 마음속도 들여다보자.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은 유통기한이 지난 오래된 음식뿐만이 아니리라. 마음속 낡은 생각들도 내보내고 나면 새롭고 활기찬 생각이 들어올 자리가 생길지도 모른다.


노성원 한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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