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유전(遺傳)/문성해
내가 잠이 들면 내 흉곽을 활짝 열고 머리가 헝클어진 할머니가 기어 나온다 늙을수록 잘 먹어야지 냉동실 속의 닭을 꺼내 껍질을 벗기고 기름을 떼고 찹쌀과 인삼과 대추와 표고버섯을 넣고 닭죽을 끓인다 하얀 찹쌀이 퍼질 때까지 할머니는 자는 나를 들여다본다 이것은 잘 때도 인상을 쓰고 자는구나 내 미간의 주름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본다 이것은 수명이 나보다 길겠네 내 길어져 가는 인중을 신기한 듯 들여다본다 내가 입맛을 다시며 자는 동안 할머니는 커다란 소반 앞에 앉아 닭 한 마리를 다 발라 먹는다 흰 뼈들을 속주머니에 다 챙기고는 생각난 듯 현관 앞으로 달려가 내 전족 같은 신발을 발에 꿰어 본다 이것은 아직도 발이 작군, 작아! 화가 난 듯 내 신발을 팽개치고는 다시 서랍을 열 듯 내 몸을 열고 냉큼 들어간다 그릇에 기름기는 다 어쨌는지 가스불은 제대로 잠궜는지 희한하게도 아침이면 아무 흔적이 없다 맞는 신발이 없어 할머니는 죽고 난 뒤 한 번도 내 몸을 멀리 떠나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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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 모습은 생전 할머니를 쏙 빼닮았다고 한다. 이모들은 가끔 날 보면 외할아버지 생각이 난다고 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아버지처럼 웃기 시작했다. 내가 간혹 밑도 끝도 없이 대책 없는 건 어쩌면 아주아주 오래전 얼굴도 모르는 어느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로 이루어진 바니까 말이다. 당신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하철을 기다리며 인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전혀 낯선 사람을 보고 괜히 빙그레 웃은 까닭은 어느 먼먼 할아버지가 슬쩍 나누어 준 인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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