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중동을 가다①]히잡, 변화의 운전대를 잡다
내년 6월부터 여성운전 허용
35년만에 상업영화관 재개관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아시아경제 서소정 기자]"저도 차를 운전할 수 있다니. 너무 흥분돼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위치한 킹덤타워 쇼핑몰에서 만난 20대 여성 아만 술리만. 그는 내년부터 여성도 운전할 수 있게 된 사실을 전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검은색 전통의상 '아바야'를 입고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 눈만 드러냈지만 쾌활한 음성과 눈빛에는 변화에 대한 설레임이 가득했다. 이 여성은 "여성이 남성 보호자의 동의 없이 여행할 수 있도록 '남성 보호자 제도(마흐람)'가 폐지되기도 간절히 원한다"고 전했다.
중동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 사우디, 금녀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사우디에서는 여성이 운전대를 잡는 것은 불법이었다. 여성 혼자 택시도 탈 수 없다. 하지만 내년 6월부터 여성 운전이 허용된다. 세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여성에게 운전할 권리가 주어진 것이다.
현재 사우디에서는 사회ㆍ경제ㆍ문화 각 영역에서 개혁ㆍ개방 정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실세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살이 2030년까지 국가 개조를 목표로 한 비전 2030 계획을 적극 추진하면서다.
운전 허용 외에도 눈에 띄는 변화로는 상업 영화관 추진이 있다. 최근 사우디 정부는 미국 2위 영화관 체인 AMC시어터스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내년 3월 상업 영화관을 개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우디에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관이 있었지만 1982년 이슬람 부흥운동 때 폐쇄됐다. 사우디 정부는 2030년까지 총 300여 곳의 영화관에 스크린 2000여개를 설치할 계획이다.
사우디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폐쇄적 국가 이미지와 달리 글로벌 문화에 밝고 대중문화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기자는 K-팝과 한류콘텐츠의 인기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쇼핑몰 까르푸에서 만난 여성 계산원은 기자를 보더니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주위의 계산원들이 다같이 기자 주변에 몰려들었고 "아이러브 이민호"를 연발했다. 그는 "TV와 인터넷을 통해 이민호를 봤다"면서 "상업 영화관이 들어서면 이민호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K-뷰티에 대한 관심도 높다. 사우디는 중동 최대의 화장품 시장이다. 특히 한국산 보툴리눔톡신(보톡스)가 단연 최고 인기다. 전통의상으로 전신을 가리기 때문에 유일하게 노출되는 '눈'에 대한 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보툴리눔톡신 제품뿐 아니라 색조ㆍ주름개선 화장품 등이 잘 팔린다.
사실 사우디 정부의 변화는 저유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측면이 있다. 사우디 전체 노동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중동 전역 최저치인 12%에 불과하다. 여성 노동력 활용을 통해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올해 사우디 경제성장률은 -0.5%로 금융위기로 유가가 급락했던 2009년 이후 8년 만에 역성장했다. 이에 살만 빈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은 석유왕국 탈출을 선언하면서 해법 모색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19일(현지시간) 내년도 사상 최대 규모 예산안을 발표하며 "석유 의존도를 기존 90%에서 50%까지 낮추겠다"며 "민간 부문을 활성화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재정 안정성을 높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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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건 여전히 힘든 일이다. 외국인인 기자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리야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발목까지 덮는 전통의상 아바야를 입어야 했다. 사우디에선 여성 혼자 택시를 타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낯선 시선도 부담이었다. 심지어 호텔을 제외한 식당에서는 여성 혼자 식사할 수 없었고, 남성을 대동해야 패밀리석에 앉을 수 있다. 커피숍도 남녀 좌석이 칸막이로 분리돼 있다.
여성의 사회ㆍ경제적 역할 역시 제한적이다. 공직 대부분 그리고 일반 사업체에는 남자 직원뿐이며 여성이 구직을 원할 때는 남성이 동행해야 한다. 현지에서 여성 의사로 활동중인 한나 발크흐씨는 "운전이 허용돼도 현행법을 따르자면 조수석에 남성 보호자가 반드시 앉아야 한다"며 "마흐람 폐지가 이뤄져서 여성이 혼자 운전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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