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다를 잊지 않겠어요 바다에서 나눈 사랑 무서워서 그 바다에 놓아 버린 사람
오늘 물빛 언덕 위로 달이 오르는데 돌아온다고 하는데 물로 둘로 갈라져 버리고 나를 버리고 달아나는 달아 달아 달아 나는
가슴 너머로 달아 돌아오는 달아 내 몸에 가라앉은 너랑 너랑 구르는 몽돌의 정갈한 이마처럼 쟁강거리는 사랑 파랑 파랑 돌아온 나의 사랑 너랑 다시 울기 위해 나는 그 바다에 뛰어들어 물거품이 되겠어요
■이 시의 압권은 단연 리듬이다. 첫 단어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단숨에 쭉 읽힌다. 그런데 '읽히다'는 '읽다'의 피동사 혹은 사동사다. '읽히다'가 피동사든 사동사든 그 주체는 '나' 즉 읽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쓴 사람까지 포함시키고 싶다. 시인이든 독자든 리듬 앞에서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나는 감히 상상해 본다. 첫 번째 연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놓아 버린 사람" 앞에 '나를'을 명기하거나 '내가'라고 쓰거나 마지막 단어 "사람"에 조사 '-을'을 적거나 여하튼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왜냐하면 어떤 식이든 리듬감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무책임해 보이는가?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시는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는 어떤 운명에 대해 쓰고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돌아온 나의 사랑 너랑 다시 울기 위해" '나'를 소멸시키고자 하는 리듬으로 충만하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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